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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방지특별법이 ‘보호’하는 인권은 누구의 인권인가?_고정갑희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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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방지특별법이 ‘보호’하는 인권은 누구의 인권인가?

고정갑희_한신대 교수

성매매방지특별법은 법과 인권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법은 성노동하는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겠다는 보호법과 여성들의 성적 서비스를 사는 성구매자, 알선업자 그리고 업주들을 처벌하겠다는 처벌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성가족부와 성매매를 반대하는 여성단체들은 처벌은 강화되어야 하며 여성들은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성매매 하는 여성들은 피해자이고, 비록 스스로는 자발적 노동이라 해도 실은 강제로 그 일을 하게 된 자들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여성들은 인권을 침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인권을 침해당하기 때문에 법을 제정하고 법으로 이들을 보호하고 이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처벌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인 것이다. 이 논리는 그 자체 문제점을 안고 있다. 누구의 인권을 말하고, 누가 인권을 말하는가를 질문하는 순간 이 논리의 모순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첫째, 누구의 인권을 말하는가? 성특법이 보호하겠다는 인권은 “성매매 된” 여성들의 인권이다. 성특법 제정 주체들은 성을 구매하는 자와 업주들이 “성매매 된”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기 때문에 법으로 집창촌을 철거하고, 변종업소도 폐쇄할 것이라 한다. 시행 후 2년이 된 지금 여성가족부는 여권법이나 업소폐쇄 등 더 강하게 법 실행의 의지를 표명하고 새로운 법을 제정하려고 한다. 이런 시도들은 여성들의 인권을 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정작 여성들의 인권을 위한다고 하는 성특법이 실은 그 여성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 특히 성특법이 집중적으로 단속하는 집창촌은 바로 여성들이 일하는 곳이며 거주하는 곳이다. 이곳을 폐쇄하겠다는 여성가족부와 정부와 반성매매여성단체들은 기본적인 권리(생존권, 노동권, 주거권)를 부인하는 셈이다. 그리고 나아가 집창촌의 여성들이 성특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면서 이 법이 자신들의 권리를 뺏는다고 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진정 그들의 인권을 위한다고 할 수 있는가?

오히려 성특법은 “성매매하는 여성들” 다시 말해 성노동하는 여성들의 인권을 침해한다. 일을 하는 대다수가 여성인 집창촌을 폐쇄한다는 것은 그 여성들의 생존권과 노동권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존권과 노동권을 고려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들을 범법자로 만들고 있다. 성노동하는 여성들은 성특법으로 인해 자신들이 거주하는 터전을 버리거나 일하지 못하게 되었다.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노동할 수 없는 조건이 주어진 것이다.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들의 인권이 보호된 것이라 볼 수 없다. 노동할 수 있는 권리가 바로 이들의 인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노동할 수 있는 조건을 찾아 나선다. 더 음성적인 업소로 가거나 해외로 나간다. 단속을 피하는 일까지 하게 되면서 이들은 더 힘든 시간들과 환경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경험을 하게 하는 법이라면 이 법은 인권을 침해하는 법이다.

둘째, 누가 인권을 말하는가? 누가 누구의 인권을 침해하는 셈인가? 법을 발의하고 제정한 사람들과 그 법을 시행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 방식은 타당한가? 성노동하는 여성들의 노동권과 거주권을 뺏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국회의원, 법무부, 여성가족부를 포함한 국가기관들, 그리고 여성단체들, 법을 실행하는 경찰들, 이들은 모두 성노동하는 여성들과 반대쪽에 있다. 이들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이들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국가다. 그래서 국가의 신인도가 문제가 된다. “국가 망신”이라는 단어가 서슴없이 등장한다. 본인들이 “보호”하겠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하는 그 일이 국가를 망신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이 법을 발의한 한 국회의원은 미국무성의 통계를 근거로 이야기한다. 국가의 신인도를 말하면서 미국무성의 통계자료를 제시한다는 것은 법을 실행하는 주체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왜 여성들의 인권을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국가의 체면 차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가? 자신들이 국가의 입장이 되고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닌 미국의 시선을 의식하는 입장이 되어야 하는가?

이들에게는 구매하는 남성들은 보이지만 일하는 여성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 여성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남성들과 업주들에게 착취를 당하거나 폭력을 당하는 대상으로만 보인다. 그 여성들은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경제적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 여성들이 스스로를 폭력을 당하고, 착취당하는 피해자로 놓지 않고 계속 그 일을 하려고 하면 범법자가 된다. 피해자라고 할 때, 성매매 된 자로 자신들을 수동적으로 놓을 때만 법과 국가의 보호대상이 된다. 그러나 자신들을 성적 노동을 하는 자로 놓는 순간, 혹은 그 일을 계속 하는 순간 이들은 법의 처벌 대상이 된다.

이 법이 시행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성노동자 운동도 시작되었다. 성매매 된 자, 구제받아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던 여성들이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고, 자신들이 성노동자임을 선언하고, 성노동자의 날을 제정하고, 성노동자 연대체를 만들었다. 성노동자들의 운동은 법의 폐지와 노동권과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현재 합법화를 주장한다. 불법으로 간주되어 법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성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이 범죄가 아님을 주장하고 합법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러한 운동에 대해 법을 제정하고 실행하는 쪽에서는 “업주의 사주를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억압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그들을 구출하고 그들에게 자활할 길을 열어주겠다”고 한다. 이 세 문장만 보아도 “그들”이 대상화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을 구출할 자들이라는 계몽주의적 의식이 깔려있다.

이 계몽주의적 의식이 단순히 의식의 차원에서 사회적인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대화의 방식이라면 문제가 없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서로 입장을 달리할 수 있으며, 그것을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른 입장과 표현이 절대적 힘을 가진 법과 공권력을 통해서 나온다면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 법과 공권력이 당장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법과 공권력이라면 더욱 문제가 있다. 성노동자 운동은 법과 공권력에 맞서는 싸움을 시작하였다. 성매매에 대해 여성주의가 법과 공권력을 동원해야만 하는 방식으로 여남불평등 구조를 바꾸어보겠다는 방법을 택한 것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여성주의는 이 문제에 대해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 보아야 한다. 성노동자 여성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바탕으로 여남불평등 구조를 바꾸어나갈 수 있도록 사회는 이들의 운동을 지지해야 한다. 여남불평등 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이들의 생존과 노동을 막는 방법이 아닌 방식으로 이들을 지지해야 한다. 인권을 위한 근대계몽주의적 방법론은 이제 시험대에 올랐다. 서구 계몽주의는 자신들의 문명과 다른 문명을 어둠으로 간주하고 그 어둠을 바꾸어 내겠다고 횃불과 칼을 들고 그 어둠의 대륙이라 부른 곳으로 들어갔다. 횃불만을 든 것이 아니라 칼도 들었다. 그 칼은 제국주의/식민주의의 칼이었다. 그 칼로 인해 그 횃불도 횃불이 되지 못하였다. 칼을 든 것도 문제였고, 다른 문명을 어둠으로 간주한 그 전제 자체도 문제였던 것이다. 방법과 전제가 문제였던 것이다.

무엇을 바꾸려고 할 때는 그 전제도 방법도 중요하다. 특히 그 전제가 누구의 시선에서 만들어진 전제인지를 잘 보아야 한다. 전제가 일부 옳다고 해도 방법론 또한 잘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누가 보이고 누가 보이지 않는지도 잘 보아야 한다. 법을 제정하고 실행하는 주체들에게 보이는 것은 남성구매자와 업주와 남성중심적 사회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법으로 대응하려는 시도는 성노동자 여성들을 목소리 없는, 행동하지 못하는 수동적 존재로 만들면서 가능했다. 우리 사회는 이제 성노동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와 행동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 고민하면서 남성중심적 사회를 변혁시켜나가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이 변혁의 주체로 성노동하는 여성들도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법을 제정한 주체들에게 일하는 성노동자 여성들이 보였다면 법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들이 보이지 않고 권력 있는 남성중심적 주체들만 보이거나 국가만 보이기 때문에 이 여성들은 남의 사주를 받는 존재들로 보이는 것이다. 성노동하는 여성들을 “윤락여성”으로 보지 않는다고 해서 이 법이 진일보한 법이 되지는 않는다. 여성들을 피해자로 놓으면서 그 여성들의 노동권과 생존권을 침해하는 법은 결코 진일보한 법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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