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로 포장된, 불온한(?) 국제결혼”- 영화 <나의 결혼원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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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로 포장된, 불온한(?) 국제결혼”- 영화 <나의 결혼원정기>
조외숙 (동국대 영화학과 박사과정/ 문화평론가)
서른여덟이 되도록 여자에게 변변한 사랑 고백 한번 하지 못 할 만큼 소심하고 숫기없는 성격의 농촌총각 만택(정재영)에게 결혼은 어렵고 힘들기만 하다. 그럴수록 며느리를 보지 못한 만택의 환갑이 넘은 어머니의 푸념은 늘어만 간다. 이런 상황에서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는 이웃집 며느리를 보게 된 할아버지는 만택에게 국제결혼을 제안한다.
결국 만택은 친구인 택시기사 희철(유준상), 나이 어린 처녀를 원하는 마흔여덟 두식(박길수) 등과 함께 소위 결혼 원정을 수행하기 위해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난다. 하지만 소심하고 연애경험이 없는 만택은 우즈베키스탄 여자들과의 맞선에서 실수만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통역과 맞선을 담당하고 있는 라라(수애)에게 마음이 끌린다.
결혼의 다른 한 방식을 보여주는 <나의 결혼원정기>는 농촌문제, 국제결혼 등 한국의 사회적 상황을 바닥에 깔고 있지만 그것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한민족 네트워크”를 운운하며 자신의 물욕을 채우는 국제결혼소개소장이 만들어내는 거짓말과 사기에도 불구하고 농촌총각과 탈북여성의 진심과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러한 순수한 로맨스 판타지는 농촌남성들의 결혼난과 세계 주변부 여성들의 결혼을 통한 이주라는 현실과 간극을 두고 구성된다.
영화는 로맨스의 순수성을 위해 라라와 만택이 만나는 장소를 우즈베키스탄이라는 제3국으로 택한다. 국제결혼하면 떠오르는 베트남이나 필리핀이 아닌, 이국적이고 비일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우즈베키스탄은, 물질적 가치가 지배하고, 서로의 곤궁함과 누추함으로 가득 찬 현실을 일순간 판타지의 무대로 변화시켜 관객을 마비시킨다. 라라는 이미 만택의 신상명세서와 그의 말과 행동에서 그가 윤택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만택 역시 라라가 뭔가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사람들이 흔히 내세우는 결혼의 조건에서 자유롭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국제결혼이 내포하고 있는 시장의 교환가치, 섹슈얼리티의 문제 등을 배제시킨다. 국제결혼, 탈북, 농촌문제 등 사회적 현상이 그들의 만남을 주선했지만 두 사람은 이러한 외부의 상황을 최소화하면서 개인적 사랑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사실 <나의 결혼원정기>를 끌고 가는 주된 소재는 결혼할 여자가 없는 농촌 총각들이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신부를 사오는(?) 최근의 국제결혼세태이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등 국제결혼을 광고하는 플랜카드가 우리의 일상으로 자리한 지는 이미 오래된 일이다. 한국남자에게 학대받는 외국 여성, 한국으로 들어오기 위해 국제결혼을 이용하는 여성들, 여러 가지 이유로 결혼 후 가출하는 여성들 등 국제결혼의 문제점 역시 심심찮게 뉴스거리로 다뤄지고 있다.
<나의 결혼원정기>에서도 28살을 많은 나이라며 더 어린 여성을 찾는 48살 두식은 돈을 매개로 더 어린 여성을 얻기 위해 흥정한다. 또 자신의 물욕을 채우기 위해 결혼이 절실한 이들을 이용하는 국제결혼소개소장의 행동은 국제결혼이 그저 사랑으로 이루어진 행복한 결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하지만 <나의 결혼원정기>는 그저 순박한 농촌 총각이 우연히 시작한 결혼 원정에서 처음 느끼는 사랑에만 집중한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예천은 도시의 변방인 농촌이고 또 다른 배경인 우즈베키스탄은 그들 앞에 놓인 세계지도에서 힘들게 찾아야하는 곳이다. 이들이 가진 변방성은 처음에는 현실성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순수한 로맨스를 위한 판타지적 공간으로 작용할 뿐이다.
영화는 담 너머로 목욕하는 여인들을 훔쳐보던 사춘기 소년이 자라 38세 남자가 되었고, 그 나이에도 몽정을 하고, 부끄러움에 직접 사후 팬티 세탁을 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등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시작하지만, 영화 속에서 만택과 라라는 손 한번 잡지 않는다. 심지어 바람둥이인 희철의 성적 행위도 늘 전희 단계에서 제지당한다. 그럼에도 농촌에서 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여성인 이웃 백인 여자, 희철의 아내 알로나는 임신 중인 모습으로 그려지면서 다른 지역에서 온 여성인 그들을 자연스럽게 앞으로 한국 농촌에서 태어날 아이들의 어머니 위치로 자리매김한다. 여기서 결혼을 목적으로 원정을 가서 획득한(?) 여성을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묶어놓으려는 불순함을 느끼는 것이 과민반응일까?
이 영화에서 거슬리고 부담스러웠던 것 중 하나는 우즈베키스탄어로 “다시 만나자”라는 뜻이지만, 한국어로는 여성을 향한 남성의 정복(?)의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단어인 “자빠뜨려”를 유머로 구사한다는 점이었다. 라라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만택이 헤어질 때 하는 말도 “자빠뜨려”였고, 공항에서 두 사람이 헤어지는 장면에서 만택이 자신의 진심을 담아 라라(순이)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도 “자빠뜨려!”였다. 두 사람의 로맨스를 드러내는데 직접적으로 사용되는 “자빠뜨려”는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유머를 구사하려는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그 이면에 결혼 원정에 나선 만택의 진심이 드러나는 것 같아 나를 불편하게 했다.
반면 영화의 초반 우즈베키스탄 여자와 말이 통하지 않아 불편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한국여자보다 오히려 우즈베키스탄 여자들은 마음을 열고 들어준다는 대답은 아이러니하지만 의미심장하다.
이처럼 이 영화가 보여주는 한국이 아닌 곳의 여자들, 타자에 관한 시선은 비균질적이지만, 로맨스 판타지라는 이 영화의 특성은 많은 것을 무화한다.
그래서 결혼 원정에 나섰던 만택과 희철의 해피엔딩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남는다. 그것이 가리고 간 현실은 여전히 비속하고 불순하므로.
은행원으로 일하던 알로나는 여전히 희철을 사랑하고 농사를 짓는 시골 생활에 만족할까? 대머리인 두식과 결혼을 하려고 하는 이십대인 우즈베키스탄 여인은 두식을 두고 사라지지 않았을까? 라라는 이제 순이라는 이름을 찾고 만택과 행복해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