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가 인권을 질문하는 이유 – 권김현영
[공감칼럼]
여성주의가 인권을 질문하는 이유
: 여자로서 인간이 되기 위하여
권김현영
나는 여자가 아닙니까?
1851년 오하이오 애크론 여성인권대회에서 한 흑인 여성인권운동가가 손을 들고 연설을 시작했다. “내 팔을 보세요. 이 팔로 밭을 갈았으며 씨를 뿌리며 수확을 했습니다. 어떤 남자도 나보다 일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남자들만큼 먹고 남자들만큼 일했습니다. 그리고 채찍도 맞았습니다. 이래도 나는 여자가 아닙니까.?” 그녀는 왜 공중 앞에서 자신도 “여자”가 맞다고 연설을 하게 된 것일까. 그녀가 원하는 여자는 어떤 여자였던 것일까?
소저너 트루스의 이 연설을 이해하려면 그녀가 자신도 여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녀는 마차에 내릴 때 손을 잡아주어야 하는 것만이 여자가 아니라고, 자기 같은 하층계급의 흑인 여성도 여자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도 다른 여자들처럼 손을 잡고 부축해줄 권리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노동으로 단련된 자신의 팔뚝을 포함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방식 그 자체를 인정받는 것이다. 그녀는 남자들만큼 맞고 먹고 일하지만 남자도 아니며, 여자들처럼 보호와 부축을 원치도 않는다. 그녀를 (기존의 호명방식대로) 여자라고 부르는 것은 충분치 않으며, 칭찬의 의미를 포함하여 “남자 못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식은 사실상 그녀의 몸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 인권의 추상성을 해체해야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범주에 여성을 포함시키면 되는 문제일까? 하지만 소저너의 연설은 그것만을 담아내고 있지 않다. 이 연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권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흑인여성노동자라는 특수성과 여성이라는 보편성이 불화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여성이라는 특수성과 남성이라는 특수성이 만나 인간이라는 보편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을 보편으로 인식하면서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여성을 정의하려는 관행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진흙탕에 밟을 까봐 조심조심 마차에서 내리는 여성을 “여성다움”의 표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여성들의 실존에서 그 표상이 도출되었다기 보다는 이성애 남성의 환상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 추상적 형식으로 존재하는 여성이라는 기호에, 소저너는 자신의 삶의 어떤 결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강력하게 제시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는 인간이 아닌가?”라는 말이 아니라, “나는 여성이 아닌가?”라고 질문한다. “남자 못지 않다”는 결핍의 말을 통해 인간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자가 아니라면 누가 여자이며 그것이 여자라고 말하는 이는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다.
각개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모두를 “인간”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이라는 개념이 추상적 보편성에서 멈추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하게 천부적인 인권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성별, 인종, 계급, 질병, 나이 등 다른 변수가 개입되는 순간 어떤 인간은 더 이상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1992년 세르비아인들이 보스니아인들을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인종학살을 저지를 때, 세르비아인들에게 보스니아인들은 “인간”이 아니라 “무슬림”이었다. 때문에 인권이라는 것은 당연히 주어져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다른 어떤 변수들로 인한 차이들보다 인간이라는 종별적 특성에 휠씬 더 광범위한 공통성이 있다고 보고, 인간으로서의 권리에 대해 “주장”하는 정치적 개념이다. “흑인도 인간이다”.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이런 구호들은 1960년대 미국의 흑인민권운동, 1970년대 한국 노동운동에서 등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란 공통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과연 무엇이냐는 데 있다. 만약 생물학적인 공통성에서 인간이란 공통성을 찾는다면, 인간과 다른 생물학적 종들을 구분하고 인간이라는 생물을 특권화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혹은 인간을 지금까지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구성되어온 각 개별들 간의 최대집합체이자, 그 최대집합체의 현실 속에서 도출되는 어떤 이념적이자 물적 지향으로서 상정한다면 무슬림, 흑인, 여성 등의 인간들간의 차이는 이 안에서 계속 부정되고 지양될 것이다. 예를 들어 서양철학사상사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가진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의 최대의 미덕은 복종과 침묵이며, 남자의 미덕은 명령이다”라며 여성은 결코 이데아에 도달하지 못하며, 남성은 여성에의 유혹을 참아야만 이성적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여성을 지양할 때 이데아를 가진 제대로된 남성-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소저너 트루스는 “내가 인간이 아닙니까?” 라고 물은 것이 아니라 “내가 여자가 아닙니까?”라고 물었던 것이다. 여성이면서 그것이 지양되지 않고 동시에 인간일 수 있는 자리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여성과 인권
지금까지 여성과 인권이라는 주제의 강연과 글들에는 주로 세계 여성들 중 특정 지역 여성들에 대한 엽기적인 인권침해사례들이 보고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여성생식기를 절단하는 아프리카의 여성할례, 여성의 발을 전족으로 꽁꽁 묶어두는 중국의 전족, 눈 외에 어떤 신체부위도 내놓을 수 없도록 통제하는 이슬람권의 베일을 쓴 여성, 남편을 따라 죽어야 하는 인도의 사티, 한국 여성의 전시동원성폭력, 태국의 아동 성매매 등이 언급된다. 미국에서 3분에 한번 씩 강간이 일어나고, 살해당한 여성의 40% 이상이 남편 혹은 파트너에 의해서이며, 미국 내 인종·계급에 있어서 차별당한 여성들의 28%가 감금·납치·강간 등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 등은 국제적 여성인권이슈로 떠오르지 않는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럴 수가!!! 라는 서구화된 눈으로 인권의 보편성과 국제법의 준수를 이야기할 때, 여성과 인권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여성해방을 명분으로 정당화시켜주는 기제로 작동한다. 인도의 사티 풍습을 없애기 위해서는 인도의 가족법과 상속제도의 부계혈통주의를 없애야만 가능하며, 태국의 아동 성매매 문제는 유럽관광객들의 소비를 통해 부를 창출하는 것을 핵심 동력으로 삼고 있는 태국의 경제구조 자체에 도전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를 특수로 보고, 그 안에 있는 여성들을 서구 여성의 기준에서 호명할 때, 우리는 종종 인권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다른 종류의 폭력을 만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은 “우리”에 대한 기대와 희망, 연대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는 측면에서 강력하고도 유용한 개념이다. 때문에 인권에서 인간이 누구인지를 다시 생각하자고 하는 것은 인권의 불가능성을 사고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권이 좀 더 정치적으로 강력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성별, 인종, 계급, 나이 혹은 성적 선택과 매개되지 않은 관계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러한 관계맺음 자체가 인간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준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관계의 맥락성을 경유하여 구체적인 개입의 지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개인으로서의 인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개인을 만들어내는 사회관계를 포함해서 인간이 만들어진다고 전제를 변화시키게 되면, 이때의 인권은 우리 안의 차이들을 지양하는 추상적 인권도 아니고, 차이와 다양성을 “포함”하자고 하는 보편적 인권도 아니게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