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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한나>와<공감>– 황의중


난 참 눈물이 많다. 혼자 눈물을 잘 흘린다. 나이 오십이 넘어도.
고등학교 때인가 남자는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아, 눈물 흘리며 망설인 기억이 한 번 있고 그 이후론 별 거리낌 없이 눈물을 줄줄 흘린다. 자연스러운 즉 꾸밈없는 일이고, 또 건강에도 좋단다. 남성주의에 대한 저항도 좀은 묻어 있을 테고.
하다못해 수능시험 감독하면서도 울었다. 1교시 언어영역의 듣기평가 방송을 듣는데 눈물이 주르르 나온다. 시험감독이 이래도 되는 건지? …. ‘뭐 아무도 안 봤으니..’

오늘 낮에도 마찬가지였다. 운전하면서 들었던 라디오 방송 때문이다.
“엄마, 장애자를 장애자라고 하는 것은 나쁜 말이 아니에요. 울지 마세요.”
이 대목에서 그만 또 울어버렸다.
엄마는 이 쪽지를 받은 후론 절대 <한나>를 키우며 울지 않았다고 한다.
<한나>는 뼈가 자라지 않는 불치병으로 상반신을 지탱할 하체 뼈가 약해,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아마 학년 초였나 보다. 방과 후 <한나>를 두 팔로 안고 가는 것을 보고, “저 애 장애자래, 장애자래” 하는 아이들 소리에 그만 엄마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고, 다음 날 엄마 주머니 속에 그 쪽지가 있었다고 한다.
“엄마, 장애자를 장애자라고 하는 것은 나쁜 말이 아니에요. 울지 마세요.”
‘아 –, 어찌 이런 아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작년 이맘 때 겨울이었다. <공감> 2주년 기념식이 있다고 해서 갔다. 가고 싶었다. 아니 가야 될 이유도 있었다. 일본의 어떤 공익변호사단체가 한국 변호사들과 교류하고 싶다며 주선을 부탁 받은 것도 있어. 한국일보사 강당이었는데, 그 날의 감흥을 적어 둔 것이 있다.

“야, 일본 사람들보다 훨씬 낫다. 훨씬 위에 있다.”
일단 이렇게 뿐이 표현하지 못했다. 같이 온 옆자리의 KIN식구들에게.
우리들은 이미 어느 분야에선 일본보다 많이 앞서 있다. 젊은 사람들이 하나둘 뭔가를 만들어 나가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다. 이곳저곳에서 새로운 우리 문화들이 창조되고 있다는 느낌.

산뜻했다. 그리고 따뜻했다.
식 진행도 깔끔하다. 사회자도 인사말씀 하시는 어른들도 모두 차분하고 따뜻하고 또 진솔하다. 말들도 참 잘한다. 왜? 꾸밈자체가 없으니. 2주년 기념파티라지만 실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후원회 성격의 자리인데, 무엇이 이다지 산뜻한 쾌감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

노래를 두어 곡 부른 뒤, <노찾사>의 인사말,
“언제라도 불러주면 오겠습니다. 이 자리에 와서 오히려 우리가 힘을 얻어 갑니다.”

모두 공감했다. 그 날 우리가 <노찾사>에게 보낸 박수 속에는 노래에 대한 답례보다 이 말에 대한 공감이 더 많이 담겨 있었으리라.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과 힘.
우리 모두는 언제라도 공감한다. 옳은 것은 아름답고, 옳은 것에 대한 희망 또한 아름다우며, 옳은 것을 실천하는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그리고 또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함께 공감하고 있다는 느낌이 다시 우리 안에 내재된 아름다운 사회에 대한 갈망과 욕망과 희망을 다시 살살 긁어대며 충동질하고 있다는 것을.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공감>은 공감을 넓히고 있다.

여기까지였다. 지금 다시 말을 조금 수정했지만. 산뜻한 충격, 따뜻한 희망이었다. 5년간 일본생활에서 돌아 와, 늘 일본과 우리를 비교하고 있었을 때였다. 물론 그 자리에서 후원회 입회원서도 써 냈고 교류 대상도 정해졌다.

오늘 오후 <공감>에서 전화가 왔다. 뉴스레터에 글을 하나 써 달라고. 바로, “예, 좋습니다”라는 답에 상대가 오히려 의외라는 듯,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무슨 <쉼표하나>라는 난인 듯한데, 기획의도도 모르고 내가 경솔하게 즉시 O.K한 것은, <공감>에 대한 이 애정, 아니 우리 사회에 이런 ‘웃기는 년놈들’이 있다는 이 뿌듯한 마음을 언젠가는 주위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아니 알려야 된다는 생각이 늘 있었고, 또 작년 뭔가 써 둔 것이 있다는 기억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오전 라디오에서 들은 <한나>의 이야기도 겹쳐지면서.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뭐 <공감>이 아름답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름답다고 말해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음, 모르겠다.

“얘들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참 많아. 너희들이 몰라서 그렇지.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고 싶은데….”

아이들에게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고 싶다. 이것도 꽤 강렬한 열망이다. 그래서 내년엔 담임을 다시 맡을 마음 준비도 하고 있고, 또 머릿속 리스트에 이 사람 저 사람을 집어넣고 있다. 그 중에 <공감>의 변호사님들도 들어 있다. 술 마다 않는 정정훈 변호사님이.

“내가 <공감> 말했나?” 아니.
“별 미친 년놈들이 다 있어요. 아니 글쎄, 대학 나와 사법고시 패스해서, 검사 변호사 돼 돈 벌어 올 줄 알았더니, 무슨 소수자 인권이다 뭐다 해서, 돈 안 받고 일하는 놈들야. 그러니 부모가 얼마나 깝깝하겠어. 일껏 자식 키워 서울법대 보내고 고시까지 패스해 놨더니. 2백만원도 안 된대. 아름다운 재단에서 월급으로 받는 거지.”

며칠 전, 마누라에게 한 소개이고, 사람들 만나 하는 소개의 첫 머리다. 일본 변호사에게도 마찬가지였고. 그들도 <공감>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이다. 어찌, 그런 일들이 가능한가? 어찌 그런 시스템이 만들어 질 수 있는가? 이 땅에. 큰 자랑거리이다.

다시 <한나>로 돌아올까?
<한나>와 그 엄마는 참으로 맑고 밝다. 엄마에게 <한나>는 너무 소중한 존재란다. 평생을 뒷바라지해 줘야 할 전생의 원수가 아니라. ‘보물단지 한나’라는 문자 메시지에 ‘다이아몬드 엄마’라고 답하는 한나. 입 벌려 시작된 말은 모두 예외 없이 그 티 없이 맑고 큰 웃음소리로 끝내는 한나. ‘어찌, 우리 땅에 이런 아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장애자를 장애자라 부르는 것은 나쁜 말이 아니라는 이 엄청난 인식이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성철 스님에 근접해 있는 것이 아닌가.

세상이 어둡고 힘들다고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세상(한국사회)이 어둡다는 것은 어찌 보면 어리석은 인식이다.
사회구조를 분석하고 전망을 하는 지식인들이 오히려 어리석은 자들일 수 있다.
세상이 움직이는 단순하고도 더 큰 것들, ‘生물’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한나>와 <공감>이 섣불리 똑똑해지지 않기를 바라도 될까?

<한나>와 <공감>이 그리는 사회 역시, 입에 침 튀기는 그런 사회는 아닐 것입니다.
그건 새로운 문화가 창조되는 것과도 너무 거리가 멉니다. 창조란 애정과 희망에서 가능한 것이니까요. 사회 발전(?)이 경쟁과 전략 운운하나 실은 한 사회의 발전이란 그 구성원들이 지닌 애정의 크기에 의해 가능한 것이니까요.
마지막 주절거림인데 저는요,
세상이, 우리사회가 어렵다 어둡다 해도 그렇지만은 않다는 판단이 옳은 판단이라는 것을 <한나>와 <공감>이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다는 것,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 황의중 1955년 생. 청량고등학교 국어 교사.

황 선생은 교육부 파견으로 일본의 오카야마 한국교육원장으로 5년간 근무하면서,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문제 해결과 일본과의 교류에 애써 왔다. 2년 전 돌아 와 학교에 복직한 뒤, 계속 이 문제에 손을 못 떼고, 에다가와 조선학교 대책위원회 및 재외동포를 위한 시민단체인 KIN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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