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례포럼후기] 폴라니가 말했다 -시장? 자유경제? 모조리 뻥이야!
홍기빈 씨 강연을 듣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경제지식은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라는 명제 단 하나였다. 사실 강연 전 홍기빈 씨가 번역한 칼폴라니의 책을 읽고 나서 강연듣기가 두려웠었다. 지금의 시장경제가 정답이 아니라는 말인 것 같기는 한데, 책을 덮고 나서도 멍하니 고개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칼폴라니는 도대체 뭐라고 한 거!?
Step 1. 시작이 절반, Total being, man as a whole!
홍대 갤러리카페 ‘kkoom’의 어슴푸레한 조명 밑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다짜고짜 묻는다.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홍기빈 씨는 강연을 시작하며 경제도, 칼폴라니도 언급하지 않았다. 사람을 말했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 짐작한 경제강연이 조금은 이상한 질문으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칼폴라니를 이야기할 때 총체적 물음이자 답이 됐다.
쉽게 말하자. 칼폴라니가 말하는 정답은 ‘Yes, Of course!!’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고, 그가 생각하는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존재라는 것이었다. 폴라니가 말하는 육체와 영혼의 결합은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이분법적 분류에 반대되는 것으로, 인간이 행하는 일을 단순히 육체적 욕구와 정신적 욕구로 나눌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건 뭐, 종교학에서 나올법한 이야기인데. 갸우뚱……. 친절한 설명이 뒤따른다. 감자탕을 먹고 사우나에 가고 싶다는 것이 100% 육체적 욕구라고 말할 수 있냐면 분명히 아니라는 것이다. 이 이상한 질문에서 폴라니의 주장의 기본 전제가 드러났다. 영혼과 육체가 반대말이 아니라 인간 속에 얽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폴라니경제의 1막1장을 여는 것은 ‘총체적 존재로서의 인간 선언’이다.
Step 2. 경제 자유주의, 거짓이 또 다른 거짓을 낳다
강연 전 홍기빈 씨와의 통화에서 강연주제가 ‘시장경제는 유토피아다’임을 전해 받았다. 우리 준비팀은 아주 당연하게 그 문장 뒤에 물음표 하나를 달아버렸다. 저마다 속으로 한 생각은 ‘비주류 경제학자가 왜 시장경제 유토피아 운운할까? 반어법이겠지’였다. 그런데 폴라니는 물음표 없이 진짜 유토피아를 말했다. 자, 함께 기억하자. 유토피아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아무 곳에도 없는 나라’임을.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이 진실로 보이기 위해서는 또 다른 거짓말들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 마치 유령 다단계회사가 만들어지듯 말이다. 어디에도 없는 회사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회사가 자신들에게 부를 가져줄 것을 기대한다. 보이지 않는 회사가 돈을 준다. 회사는 보이지 않지만, 돈은 눈에 보인다. 뭔가 미심쩍지만 믿는다. 유령 다단계회사는 서서히 무너지지 않고 한순간에 사라진다. 쉽게 생각해서 폴라니에게 시장경제는 이런 유령회사와 같은 것이었다.
인간은 호모이코노미쿠스(인간은 이기적 존재로 굶주림과 이익만으로 움직인다)라는 경제학 기본명제에서부터 거짓말은 시작된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식민지착취 등을 자행하면서 이런 현상을 설명할, 아니 상대방의 것을 약탈하는 행위가 곧 자신의 부로 이어지는 유럽사회를 정당화할 수 있는 하나의 질서가 필요했다. 새롭게 등장한 경제질서를 지키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이 등장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총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부정하고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킨 것이다. 요지는 단 하나다. ‘욕구를 설명하는 것이 복잡해지지 않게, 기본명제를 유지할 수 있게 인간의 정신을 개입시킬 생각 따위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거짓말이 사회에 자리잡으며, ‘누군가를 돕고 싶다’, ‘배고픈 아이에게 내가 가진 빵 하나를 주고 싶다’ 하는 생각이 정신적 욕구로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또 폴라니는 시장경제는 19세기 내내 단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시장경제는 시장이 모여 독자적 체계로 구성되고, 모든 경제활동이 시장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통제받지 않는 시장으로만 지배된다. 우리가 믿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맺음 속에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이고, 순수한 의미의 시장경제는 현실세계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순수 경제적 규칙만으로 형성된 시장이 유토피아라는 것은 인간이 총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때 열심히 외웠던 ‘보이지 않는 손’도 ‘뻥’이라는 폴라니의 고백은 충격이다.
Step 3. 태초부터 시장경제는 없었다
인간존재에 대한 처음의 거짓말이 너무 강했던지, 이 거짓이 깨지지 않게 더 강한 거짓말을 해야 했다. 폴라니경제의 두 번째 명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사람, 자연, 화폐는 결코 상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19세기 시장경제는 사람, 자연, 화폐에게 노동, 토지, 화폐라는 이름을 주고 상품이라는 옷을 입혔다. 상품은 기본적으로 시장에 팔기 위해 만들어진 것,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것이다. 폴라니는 노동, 토지, 화폐를 허구적 상품이라 했다. 허구적 상품이 완전한 상품이어야만 시장경제가 성립되는 것이다. 일반균형과 자기조정시장은 시장경제의 공인된 특성이며, 시장은 유연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노동, 토지, 화폐의 영역에서 최저임금제, 보호관세 등 허구적 상품을 유지시키기 위한 국가의 개입이 성립한다. 왜? 경제학자들이 설정한 시장은 유토피아이지만, 현실에서 경제활동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구체적인 관계이기에 냉정한 제도의 틀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과 스미골같은 이중인격의 모습을 시장경제에서 엿볼 수 있음이다. 이처럼 시장경제의 거짓말들을 지적하는 폴라니경제는 19세기 경제적 자유주의 비판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Step 4. 폴라니경제에는 인간이 존재하더라
폴라니는 시장경제가 ‘성립할 수 없는 거짓의 집합’이라 말하며, 시장경제의 비인간성을 고발했다. 시장경제의 옳고 그름을 떠나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는, 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환상임을 폭로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라 총체적이며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장경제가 성립될 수 있었던 두 가지의 큰 가정(호모이코노미쿠스, 사람’자연’화폐’의 상품화)에 폴라니는 “뻘소리 말라”며 맞섰다. 이렇게 경제라는 같은 주제를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폴라니경제에 인간이 있기 때문이었다. 폴라니는 굳이 인간을 경제학적 특성으로만 골라내지 않았고, 인간이 가진 정신적 특성까지 포함해내려 했다.
그러면 폴라니경제가 정답인 것일까? 폴라니가 경제를 넘어 인간의 삶을 들여 보려 했다는 것, 물질을 넘어 정신적 영역까지 들여 보려 한 것에 공감을 표한다. 그러나 사회를 바라보는 틀 중, ‘완벽한 정답’이 나올 수 있을까? 폴라니가 말한대로 인간은 총체적인 존재이다. 이것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본다면, 인간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을 하나로 엮어낼 수 있는 ‘틀’이란 건 없을지도 모르며, 그저 하나의 이론은 단면을 바라보는데 유용한 도구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폴라니가 시장경제의 허구를 말하며 서비스업이 인간관계를 상품화시켜 인간관계 파괴를 가져왔다고 했는데, 다른 사회적 변화를 보지 않고 이것만을 진짜 원인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라는 물음이 생겼다. 결과에 따른 다양한 원인 중에 하나일 것인데 시장경제의 환상을 주장하는 폴라니의 확대된 시각이 아닐까?
분명한 것 하나는 이제까지 내가 알아온 경제학의 주체는 사람이 아닌 사람이 가진 욕구였다. 폴라니를 통해 이를 발견하게 됐다. 주류 경제학에서 사람이 아닌 사람의 욕구에 집중하면서 만들어낸 허상의 시장이 완전무결하지 않음을 우리는 이미 현실에서 만났다. 지난해 월가에서 시작된 미국의 금융위기를 지켜보면서 세계는 탐욕의 허상이 만들어낸 결과임을 비판했었다.
거짓투성이인 경제에 폴라니경제가 새로운 대안이 될지, 또 다른 대안을 만들어 내는 시작점이 될지 아직은 모르겠다. 단지 강연 전 내가 가진 유일한 경제지식이었던 호모이코노미쿠스를 머릿속에서 지우게 됐을 뿐이다.
글_황가혜(공감 9기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