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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원 칼럼] 과거사 청산의 의미 – 이상희 변호사

 


 


 몇 년 전 인도네시아 쿠팡에서 육로로 동티모르를 다녀왔다. 14시간 좁은 봉고차에 몸을 싣고 어렵게 도착한 동티모르, 그곳은 나에게 평화와 저항의 땅이었고 또 다른 세계를 향한 가능성의 땅이었다.







 인도네시아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6년 밖에 지나지 않아서인지 인도네시아 군부가 24년간 저지른 만행들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딜리 시내 유일한 도서관, 구스마오 도서관에는 인도네시아 식민지 상황을 담은 동영상이나 다큐멘터리 자료들과 국내외 독립활동 사진들로 가득차 있었다. 내가 만난 많은 동티모르인들은 해방 과정에서 보여준 전세계 민중들의 지지와 연대를 잊지 않고, 또 다른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 많은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







 동티모르의 독립을 동시대에 경험한 필자로서는 역사적 장소들을 방문하여 그 시간들을 회상하고 싶었다. 전세계 민중들의 관심과 연대를 불러온 사건의 현장, 산타크루즈 묘지를 찾았다. 1991년 인도네시아 군에 살해된 세바스찬 고메스를 추모하기 위하여 산타크루즈 묘지에 모인 사람들이 평화시위를 벌이다가 인도네시아 군인들의 무차별 발포에 약 270여명이 사망했는데, 그 당시 현장에 있던 외신 기자의 현장 촬영으로 외부 세계가 처음으로 동티모르 상황을 접하게 되었다. 세바스찬 고메스 묘지 주변에는 학살에 관한 간단한 설명만 적혀 있다. 학살 당한 분들의 묘역이 근처에 있나 둘러보았는데 사망 날짜가 다들 최근이다.







 딜리에서 지역 라디오 방송 활동을 하는 유리코에게 그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묘역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간단하게 없다고 답해 버린다. 너무 무성의한 답변인 것 같아 재차 물어보았지만, 그 사람들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모른다는 답변만 했다. 그 친구의 답변이 너무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모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대부분 실종된데다가 학살 이후에도 인도네시아 식민당국의 잔혹한 식민지 지배가 계속되었으니 어떻게 시신을 찾고 묘역을 만들 수 있었겠는가?







 그러면서 오히려 실망하고 화를 낼 상대는 나와 우리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경중을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 동안 묘역을 만들기는커녕 사실을 밝히는 것조차 두려워하거나 무시해 오지 않았나,.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더라도 정부나 가해자 측에서 반성이나 사과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있었던가.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 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미국 외신에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보도하기 전까지 정부는 이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월미도에 맥아더 동상이 세워져 있으나, 그 맥아더가 상륙하기 위하여 미군이 민간인이 거주하던 월미도 동쪽지역에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무차별 기총 소사를 가해 거주지를 완전히 파괴한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최근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상규명). 50년이 지난 이후에야 비로소 보도연맹 사건의 진상 규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해방된 지 60년이 지나서야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냉전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수단으로 왜곡된 과거사가 뒤늦게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정부의 과거사 청산 작업은 피해자와 유족들의 명예회복 및 피해 구제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정의를 회복하고 다시는 동일한 범행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그래도 끊임없이 과거청산을 위한 투쟁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어렵게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과거사 청산 작업을 정권 차원의 문제로 보고 과거사 청산의 역사적 대의를 훼손하고 있으며 뉴라이트는 한국 근현대 교과서를 정치의 장으로 끌고 들어와 역사를 정치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간첩조작 사건에서 드러난 정치검찰의 문제,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건 등에서 나타난 언론 탄압, YH노조 김경숙 사망 사건을 통해 드러난 시위 과잉 진압의 문제 등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전혀 낯설지가 않다. 현재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있는 묘역마저 파헤치며, 이전의 과거사를 반복하려고 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과거사 청산 작업을 방해하려는 이명박 정부의 의도가 무엇인지 뻔히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지금 어느 때보다도 과거사 청산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어렵게 규명된 과거사 속에서, 가해자가 어떻게 역사를 왜곡했고 그 안에서 얼마나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이런 과거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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