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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 칼럼] ‘술 푸게 하는’ 법치 – 박래군 활동가




 


한 때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개그 프로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인 ‘나를 술 푸게 하는 세상’에서 한 개그맨이 던진 이 말은 방영되자마자 순식간에 인기어가 되어 버렸다. 이 말처럼 이른바 ‘루저’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시대 말이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술 푸게 하는 세상은 변하지 않고 있음에도, 아니 더 악화되었음에도 그 말은 이제 유행어가 아니다. 심정이 더러워서 술 푸고, 처지가 서러워서 술 푸고, 열 받아서 술 푸고……. 우리가 기뻐서 술 푼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용산 철거민들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있을 때마다 나는 술을 펐다. 열 받아서, 화가 나서, 욕지거리와 함께 술을 퍼 대고는 했다. 술을 푼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은 없음에도, 술이라도 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을 법원은 매번 만들어 주었다. 구속 철거민들에 대한 항소심 재판 결과가 그랬고, 불구속 철거민들에 대한 선고가 그랬고, 전국철거민연합회(이하 전철연) 남경남 의장에 대한 1심 선고가 그랬다.



최근 법원의 모습을 보면 인신구속 문제에 대해서 많이 신중해지고, 불구속 재판이 정착되는 것 같아서 형사소송법의 개정 취지가 많이 반영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구속자도 많이 줄어서 대체로 평균 구속자가 4만 5천 명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구치소와 교도소의 수감자가 6만 명 정도에도 못 미치니 이것은 아무래도 법원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직도 압수수색영장의 발부나, 통신비밀에 관한 영장 등의 발부에서는 인권적인 원칙이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조금 비켜나보면 법원의 태도는 여전히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더러운 세상을 견결하게 지키기에 여념이 없다. 계급적 사안에 대한 법원의 태도는 분명하게 지배계급의 이해를 앞서서 옹호하는 판결태도를 보인다. 노동자나 농민들의 민중생존권 투쟁에 대한 판결은 예나 지금이나 가혹하다. 이번 용산 철거민들의 재판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정형사소송법이 도입한 공판중심주의도, 증거법칙도 모두 무시된 채 오로지 ‘국법질서에 도전한 행위이므로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검찰의 논리가 그대로 판결의 논리로 이어졌다. 검찰과 법원은 이 점에서는 국법의 수호자라는 점에서 서로 뒤지지 않으려고 경쟁하는 모습이다.



지난 5월 31일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부장판사 김민욱)는 망루 투쟁에서 생존한 철거민 9명에 대한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구속자 7명에 대해서는 4년에서 5년이라는 중형을 선고했고, 불구속자 2명에 대해서는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재판부의 중형선고 이유는 철거민들이 공권력에 도전한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할 수 없고, 경찰이 안전대책 없이 무리하게 진압한 점을 인정하더라도 이는 불법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안전대책을 제대로 세우지도 않은 채 무리한 진압을 단행한 것으로 인해 사람 목숨 여섯이 죽어나갔는데도, 진압 방법은 경찰 본연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법원의 논리는 결국은 어떤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공권력에 도전하면 죽어도 싸다는 얘기와 진배없다.



2심 재판부는, 화재의 원인에 대해서 철거민들이 일관되게 화**을 던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화** 던지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1심 재판부와 같이 화** 외에 다른 화재의 가능성은 없다고 일축했다. 결국 자신들이 죽을 수 있음을 알고도 망루 농성 중이던 철거민들 중에서 화**을 던져 대형화재가 발생했고, 따라서 농성을 벌였던 전철연 소속의 철거민들을 자살테러분자로 규정해버린 것이었다. 그로 인해서 이충연 위원장 같은 경우는 아버지마저 불에 타죽게 한 패륜아라고 단정 지은 것이었다.



8월 13일에 있었던 전철연 남경남 의장의 1심 선고에서는, 철거민들의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10년 넘도록 지난한 투쟁을 한 결과, 겨우 임대아파트 한 채와 이주비를 시공사와 조합 측과 합의하여 사건을 해결한 것을 공갈․협박과 갈취 혐의로 인정하여 징역 7년의 중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거대한 건설자본을 협박하고 공갈해서 갈취했음을 인정한다며, 아마도 살인죄의 피의자에게나 내릴 법한 중형을 선고한 법원의 이 판결 앞에 법을 앞세운 지배세력의 무서운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사회적 약자인 철거민들이 연대해서 집회하고 저항하는 이런 것마저 중형의 대상이 된다면 이 정부에서 말하는 이른바 서민들은 어디에 호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법원의 태도는 숱한 비리 사건의 주역들인 재벌이나 정치인들을 단죄하는 경우와는 상반된다. 언제나 경제성장과 사회 ․ 국가에 공헌한다는 점을 인정하여, 사회의 고위층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렸던 것은 법원이지 않았던가. 그들의 탐욕으로 인해 숱한 사람들이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가정이 파괴되고, 결국 죽음의 상황에까지 몰렸다는 점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는다. 아니 어쩌면 법대 위에 올라앉은 판사 나리들의 사고방식 속에는 사회적 약자들의 서러움이나 분노 같은 것들이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지 모른다.



구속자들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 불구속자들에 대한 2심과 대법원의 판결이 남았고, 남경남 의장에 대해서는 2심과 대법원 판결이 남았지만 부를 가진 자와 권력을 쥔 자들의 편이기를 서슴지 않는 법원의 태도, 상급심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보수적인 판결경향을 보이는 법원의 태도로 보아서는 뭔가 바로 잡힐 것이란 기대는 아예 할 수 없다. 형량이 조금 깎일 수 있을까, 법리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원심 판결을 파기할 수 있을까, 기대할 수 없는 상급심에 대한 항소니 상고니 하는 것은 참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어쩔 수 없이 상급심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아픈 현실이다.



법치가 존중되기 위해서는 입법자의 법 제정절차나 취지가 정당해야 하고, 법 적용도 정당해야 하며, 법원의 판결도 공정해야 한다. 힘 센 자들과 가진 자들의 힘에 의지해서 일방적으로 법을 제정하고, 적용하고, 판결한다면 법은 외면 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런 법치가 ‘유전무죄, 무전유죄’ 풍조를 굳히고, 그때 법은 법에 의한 억압 외에 다른 것이 아니게 된다. 사회경제적 약자인 철거민들의 고통에 법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라고 하지만, 제발 공정성을 유지하여 법원이 정당한 판결을 내렸으면 좋겠다. 가진 자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더러운 판결 때문에 술 푸지 않도록 법원의 각성이 있기를 바란다. 법원마저 외면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법에 기대지 않고 법치 외의 수단을 추구해야만 하는 세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법원이 바뀌어야 한다. 기대할 수 없는 기대를 하는 나는 또 다른 판결 때문에 술을 푸게 될지 모른다, 오늘도.


 


글_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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