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문위 칼럼] 시대의 우울 – 여영학 변호사
독재 권력의 높고 단단한 장벽을 허물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청춘의 꽃잎들이 민주주의의 제단 앞에 스러졌다. 끝내 육중한 우상이 무너지고 무대도 바뀌었지만 길은 아직 험난하다. 곳곳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이들의 영정이 즐비하다. 일터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은 공권력의 쇠파이프에 피투성이가 된다. 광장의 군중을 두려워하는 밀실의 권력은 무턱대고 에워싸고 틀어막고 불허한다. 제도의 시계마저 거꾸로 돌리려 한다. 방송 길들이기와 언론 틀어쥐기에 안간힘을 쓴다. 사람들의 입과 귀를 봉쇄한 눈먼 권력은 이제 강까지 봉쇄하겠다고 나선다.
거꾸로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 위에서 우리는 어지럽고 불안하고 우울하다. 뼈아픈 상처와 악몽이 되살아난다. 감시, 미행, 불법체포, 고문, 최루탄, 데마고그, 은폐, 날조, 보도지침······. 그다지 먼 옛날도 아니다.
입추가 지나자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하다. 하지만 한낮의 뙤약볕은 기세가 여전하다. 계절이 여름의 문턱을 넘어 국화향기 가득한 가을 들판에까지 다다르려면 앞으로 한참을 더 가야 한다. 생각해보면 지난봄이 올 때도 그랬다. 얼음이 녹고 개나리가 금세 꽃망울을 터뜨릴 듯하다가도 갑자기 꽃샘추위가 몰려오기 일쑤였다. 산 너머 봄이 오는 조붓한 오솔길은 늘 그렇게 순탄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불안해할 일도 없다. 비틀거리며 천천히, 우왕좌왕하더라도 나아는 갈 테니까. 긴 안목으로 보면 역사의 강을 가로막고 나섰던 그들은 모두 종이호랑이였다. 또 강은 제 앞을 막아서는 무수한 걸림돌을 휩쓸고 태산을 에돌아 어떻게든 물길을 열어가지 않던가.
뜻하지 않게 주춤거리고 되돌아가고 몇 걸음 물러서는 사이에 우리는 도리어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는 중이다. 외국인노동자, 장애인, 성적 소수자 등등 그늘진 곳에서 누구도 관심 갖지 않던 이웃들에게까지 눈을 돌리고, 나라 밖 빈곤과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도 손길을 내밀게 되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자기 성찰의 기회까지 얻게 되었으니 더더욱 그렇다.
숨 막히고 답답할 까닭은 하나도 없겠다 싶다. 한숨 대신 깊은 밤 귀뚜라미 소리에나 귀기울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