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감

절망보다는, 희망의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영화감독 변영주

관람객이 천 만명을 돌파하는 블럭버스터 영화가 여러편 등장 했을 만큼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규모가 확대되고 있다고들 하지만 아직 일부에 지극히 편중되어 있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낮은 목소리>는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극장에서 본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또한 같은 맥락에서 그 다큐멘터리를 만든 변영주 감독에 대해 말들이 넘쳐나지만 그녀와 직접 마주앉아 본 이 역시 드물 것이다. 조곤조곤하게, 그러나 듣는 이의 귀를 집중시키는 목소리를 가진 그를 어느 추운 겨울날 인사동의 아늑한 찻집에서 만났다. 약속시간에 앞서 찻집에 앉아 오히려 우리를 여유롭게 기다리는 모습에서 이미 다른 인터뷰 기사에서 보인 그녀의 퉁명스러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변영주를 소개할 때 ‘여성주의’ 영화감독이라고들 한다. 과연 ‘여성주의 영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 2000년대에 들어 논의의 양상을 보면 어떤 개념을 이야기할 때 항상 최강의 협의 개념으로 특정화시키지 않으면 모호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광의가 아닌 협의의 개념으로 보아도 여성주의는 무엇인지에 대해 입장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개념으로서의 ‘여성주의’를 논의하는 데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보다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살 것인지 결심하느냐,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느냐가 여성주의의 핵심이라고 본다. 아주 단순하게 보는 이 중에 여성이 만들면 여성영화라고도 하는데 그건 아니다. 일본에서는 여성 감독으로서 가미카제를 찬양하는 영화를 만든 사람도 있는데 나는 그런 사람을 여성주의 영화감독이라고 부를 수 없다.

변영주 감독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넘나들었다. 다큐멘터리인 <낮은 목소리> 속 여성은 서로 간의 대화를 통해 내적 상처를 치유하는 등의 생동감 있고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준 반면, 극영화인 <발레교습소>, <밀애> 속 여성은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인 경우가 많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 보여지는 여성의 모습이 구별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리고자 했던 캐릭터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밀애>의 주인공 미흔을 통해서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이야기 할 때) 분당에 사는 중산층의 여성들에게 이혼은 어렵지 않다고 얘기해주고 팠다. 그들과 다른 결심을 하고 다른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해 조롱하듯 스쳐지나가지 말고 다시 한번 관심있게 봐달라고 즐겁게 부탁하고 싶었다. 현실 속에서 이혼 가능한 상황 앞에 서서 머뭇거리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질문과 같은 아이러니는 ‘변영주’에게 기대하는 것과 나타난 것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발레교습소>에서의 황보수진을 통해서는 삶이 머리로 이해할 수 없으므로 쉽지 않다는 것, 불행은 때로 이해의 경계 너머에 있다는 것, 고통의 근원을 누구 탓으로 돌릴 수 없는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고 싶었다. 결국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하는 2000년대의 일부 여성주의자들에게 장난스럽게 ‘메롱’을 날리고 팠다. ‘여성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실제 일상에서 주저주저하는 여성들을 있는 그대로 지켜봐주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보수진은 이것을 깨닫고서는 길거리에서 얻어맞고 집에 와서 엄마 품에 안겨 엉엉 울고 마는 것이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영화에서도 내가 지지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데려오는 인물들이 중심이 될 것이다.

학창시절에 대해 ‘구질구질한 청춘이었다’고 표현했다. 영화에서도 다양한 문제의식이 엿보인다. 그런데 영화 <발레교습소>는 기존의 변영주 영화와 다르게 상당히 훈훈하게 느껴진다.

– 그렇게 말은 해도 나는 자학적인 인간은 아니다. (웃음) 그러한 이야기들은 스스로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고나 할까. 나는 기본적으로 절망보다는 희망의 영화를, 만화로 치면 <몬스터> 보다는 <20세기 소년>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고 싶다. 여러 문제를 담았고 그만큼 애착이 있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발레교습소>가 흥행에 실패한 것은 10대가 보기에는 어렵고 20대가 보기에는 유치할 수 있어서 그 사이에 놓여 겨냥을 잘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연 배우가 영화 촬영 직후 군입대를 하는 바람에 그 가수의 팬을 잘 끌어 모으지 못했던 점도 있고 배급 상의 문제도 있었다.

영화 속에서 일상의 폭력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폭력에 대한 견해는?

– 우리는 기본적으로 폭력에 관대한 사회에 살고 있다. 최근의 연예인들에 의해 불거진 논의를 지켜보면서도 과연 ‘맞아도 쌀 사람’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폭력을 익숙한 것으로 보는 인식에 대한 전복이 필요하다. 범죄 아닌 폭력이 지나치게 우리 사회에 많기 때문이다. 광주에서의 일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진압 군인들도 피해자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군인의 명령을 이러한 때에는 거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누가 말하고는 있나? 일제시대의 일에 대해서는 광분하면서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왜 용서하자고 말하는가? 폭력의 심화가 계속되어 와서 전경의 폭력이 정당화, 일상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여성문제를 이야기 하면서 그에 대해 공적 언급을 줄여야겠다고 하셨는데 그러한 계기가 있었나

– 홍대 앞의 한 술집에서 생긴 일인데, 나를 알아본 한 취객이 ‘페미니스트는 결국 마초 아냐?’라는 말을 했다. ‘잘 모르는 이들에게 내가 그렇게 비쳤구나. 여성주의는 지극히 좋은 삶의 방식인데 이렇게 신날 수 있는 것을 그런 선입견 때문에 갖지 못하다니’하는 생각을 하면서 일종의 죄책감을 느꼈다. 여성주의는 짓밟히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맞지 않는 한 그 심볼이 되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불행한 친구들을 보고.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인상적으로 봤다. 최근 국제 결혼, 이주 여성 등 다양한 문제들이 새로 등장하였는데 이렇게 국제적인 이슈들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 그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항상 멋진 제목을 짓는 한 필리핀 영화감독의 영화인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전시에 사는 것이다>라는 제목에서 따왔다. 정치적이면서도 문학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아시아’의 ‘여성’은 이중의 식민지를 살아가고 있는 것에 다름없다. 8년 전 일본 피스보트에서 한국 사람을 처음 초청하여 <낮은 목소리>에 등장한 한 할머니와 함께 배에 오른 적이 있었다. 베트남에서 한국군 피해자 마을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일본 위안부를 경험한 한국 할머니에게 거부감을 줄 수도 있는 일정이었다. 특정 시각을 그 분에게 강요할 수도 없고 다만 사실관계에 대한 설명만을 드렸다. 나는 그 때 혹시 할머니께서 우리가 베트남에게 가한 피해를 이해하지 못하시고 의도와 다른 폭탄 발언을 하실까 두려워했었다. 그런데 이 할머니께서 베트남의 피해자들을 만나시고는 ‘내가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으려 노력하고 있듯이 자네들도 베트남의 한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해라. 방법을 잘 모르겠다면 내가 일러주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과장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국제적인 솔리다리떼를 느꼈다.(웃음) <낮은 목소리>를 만들면서 할머니들만의 언어로 사람에게 미치는 감동을 주는 그런 순간을 다시 보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 감독으로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예술가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 정치적 활동을 하는 것은 내가 유명하기 때문에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해서이다. FTA 관련해서 영화인들이 갑자기 자기 일이 걸리니 나섰다고 말들 하는 것에 억울하고 분했다. 영화인들은 지난 15년간 첨예한 투쟁에서 항상 선두에 서왔다. 장산곶매 파업투쟁이 그 대표적이다. 유명하고 성공한 영화인들은 진보적인 경우가 많고 오히려 흔히 말하는 ‘보수우익’은 영화계에서 마이너다. 문화예술 영역에서 보수우익은 촌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예전부터 여러 가지 활동을 했음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그래봤자 돈만 많이 벌었다는 영화인들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도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떳떳할 수 있다. (웃음) 나는 한국 사회에 대해 위기감을 갖고 있고 우리가 무식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깊이 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우들이 외제차 탄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잘 지켜봐라. 외제차타면서 FTA 반대 운동하는 사람들은 배우들 뿐이다. 계급성을 넘어서 운동하는 이들이 놀랍지 않은가. (웃음) 게다가 그 배우들은 스크린 쿼터가 없어도 외제차 몰 사람들이고 스크린쿼터가 없어지면 지금 외제차 안 모는 나머지가 피해를 보는 것이다. 10년 전 일본에 가보고 느낀 그 때의 젊은이들이 현재의 우리나라의 젊은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자민당 찍는 사람이 바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똑똑해지려고 고생하지 않고 담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 예로 농민 투쟁 사진에 담겨있는 각목들고 있는 이들에 대해 멋지네 뭐네 하는 리플들을 보며 답답했다. 포털 사이트의 댓글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그 댓글을 여론인 양 보도하는 언론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이슈는? FTA에 대해 담론 자체가 형성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담론이 이렇게까지 밖에는 형성되지 못하는가.

영화를 보면 ‘옳은 것’을 담으려고 노력하는데 본인이 생각하는 옳은 것에 대한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조바심은 없는가.

– 옳은 것은 매번 달라진다. 그렇지만 내가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서슴없이 말한다. 밖으로부터 공격받아야 변화할 수 있고 보다 좋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언하지 않으면 나는 제어되지 않는다. 잘못된 것을 뱉지 않으면 슬그머니 내가 그런 짓을 하면서 합리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은 영화보다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 인감도장은 영화다. 내가 생각하는 옳음의 가치판단 기준은 어느 책에서 봤는데 ‘미국 뉴욕의 빈민가에 사는 장애를 가진 흑인 레즈비언 노인’이다. 내가 생각하는 옳음을 벗어나 행동하는 ‘나’에 대한 배신은 두렵지 않다. 빨리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나의 가장 큰 장점은 얼른 얼른 반성하는 것이고 반성을 잘하는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특별하게 좋아하는 영화나 영화감독이 있는가 – 특정 영화나 감독을 쫓지는 않는다. 다만 아주 다양한 사람들을 좋아하는데 <밀애>에서는 모네에게 바치는 오마쥬가 많았고 <발레교습소>에서는 프랑수아 트뤼포를 생각했다. 지금은 1950-60년대 미국의 추리소설이나 느와르 영화를 생각하며 그것들을 반영하는 영화를 찍고 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고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찍는다. 어렸을 때를 생각하자면 초등학교 때에는 헐리우드 영화를 주로 봤으며 감명 깊었던 것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였다.

‘변영주’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가지게 되는 이미지는 노랗고 짧은 염색 머리에 얼굴 주위에서 손을 흔들며 이야기하는 다소 건조하고 공격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 시절에 아이스크림 포장지 만드는 공장에 노동운동 하는 친구들과 취업했다가 하루에 대여섯 명씩 기계에 손가락을 다쳐 피를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고 4일 만에 그만 두었다고 했다. 혁명가도 공부쟁이도 될 수 없는 스스로의 모습에 서글펐다고도 했다.

인터뷰 내내 머뭇머뭇하는 현실의 많은 여성들의 모습을 스스로도 일부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자신, 혹은 타인의 면모를 직시하며 보듬어 안는 그의 따스한 눈길이 돋보였다. 소수자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하여 영화를 만들고 이를 통해 생기는 소소한 변화를 말없이 지켜보는 영화감독 변영주. 그녀가 인사동의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제발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는 그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게 되었다.

 

 

 글: 홍은기_공감인턴
사진: 전영주_ 공감간사
인터뷰: 박성룡, 박영미, 이보윤, 이정예, 홍은기 인턴

공감지기

연관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