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푸제온 강제실시 “인간의 가장 존엄한 권리, 생명에 관한 이야기”
비싸서 먹을 수 없는 약은 약이 아니라 ‘개똥’이다. 일 년 치 약값 2200만원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은 필요한 약에 접근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환자를 살리는 약과 환자를 절망에 빠뜨리는 약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돈이다. 한해 303억 달러의 이윤을 얻는 제약회사와 약이 없으면 살 수 없는 환자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싸움을 하는 사회에서 약은 그저 돈에 팔리는 ‘상품’일 뿐이다.
한 병에 ‘3만 원 이하’로는 약을 공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을 4년 동안 공급하지 않은 제약회사 로슈에 대해 시민단체는 강제실시를 청구했다. 그러나 지난 19일 환자의 생명권은 기각됐다. 정보공유연대에서 25일 열린 정례 세미나에서 정정훈 변호사와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변진옥 정책위원은 강제실시의 배경과 그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특허권은 사다리 걷어차기”
로슈가 이렇게 푸제온에 대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특허권 때문이다. 이것은 ‘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오른 사람이 그 사다리를 걷어 차 버려 다른 사람들이 올라올 수단을 빼앗는 매우 교활한 방법’이기도 하다. 때문에 특허권이라는 배타적 이익으로 공익이 심각하게 침해됐을 경우, 제3자가 강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이 만들어졌다. 사다리를 다시 바로 놓아 주는 역할, 바로 강제실시다.
“수많은 우려 속에도 우리가 강제실시를 청구했던 것은…”
처음부터 강제실시를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푸제온을 얻기 위해서 안다녀본 데가 없었다. ‘이윤보다 생명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피켓 시위는 물론 푸제온을 만든 제약회사 로슈에 직접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돈을 주고 약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우리도 잘 모르겠다’는 답변뿐이었다. 로슈의 푸제온 요구가인 3만원과 정부가 제시하는 보험가 2만 5천원의 차이는 끝내 좁혀지지 못했다. 번번이 협상은 실패했고 에이즈 환자들은 생명을 연장할 권리를 잃어갔다. 협상을 이뤄내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양측이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다. 그러나 제약회사만이 약의 원가정보를 가진 ‘정보의 비대칭성’이 존재하는 협상 테이블이라면? 정부는 그 테이블에서 자신의 카드 패조차 제대로 쓰지 못할 게 뻔하다. 원가 공개 없이 이뤄지는 이 협상에서 애초부터 합리적인 약가란 존재하지 않았고 접점을 찾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협상 어디에도 환자의 생명권을 고려해 값을 정하겠다는 의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결국 남은 것은 강?실시라는 방법 뿐. 하지만 강제실시는 급박한 국가적 사태가 있을 때에만 실시하는 것이고 개발도상국 외에는 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강했다. 또 에이즈 환자 수가 적은 상태에서 약을 공급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강제실시만이 유일한 대안인지에 대한 고민까지 수많은 심리적 저항선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강제실시청구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약에 대한 접근권이 전적으로 기업에게만 있다는 치명적인 현실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픈 사람들은 누구든지 약을 먹을 권리가 있다는 상식, 그 곳이 출발점이었다.
“공급 중단을 개발비와 통상마찰 탓으로 돌리지 마라”
그 전에도 몇 번의 강제실시 청구가 있었다. 2003년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의 강제실시 청구가 기각된 것도 ‘단지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로 특허권을 정지시키면 개발에 막대한 자금과 공을 들인 기업들의 기술개발 의욕을 꺾을 수 있다’는 ‘경제적’ 이유에서였다. 의약품은 그 특성상 개발비에 비해 복제약품 생산 비용이 훨씬 적게 들기 때문에 특허의 독점력이 강하다. 이로 인해 환자들이 약을 공급받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해도 기업들은 특허권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약품 개발 과정 중 1, 2차 임상단계에서는 대체로 제약회사의 비용이 아닌 공적 자금이 투입된다는 사실, 그렇다면 제약회사의 주장은 얼마나 설득력을 얻을까?
강제실시를 했을 경우 통상마찰이 우려된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변진옥 정책위원은 “강제실시는 세계무역기구가 인정한 합법적 조치이며, 성공적으로 의약품 강제 실시를 한 태국을 보더라도 실시 후 통상마찰은 없었고 오히려 사회복지가 증가했다”고 반박했다.
“기각으로 인해 산소호흡기는 떼어 냈지만”
1년여의 준비기간이 있었다. 강제실시 청구 후 두 달이 지나자 로슈는 갑자기 무상공급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생명이 걸려 있던 중대한 문제가 너무나 손쉽게 강제실시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됐다. 결국 청구는 기각 당했다. 그동안 강제실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들은 ‘로슈가 현재 무상공급을 하고 있으므로 의약품 접근권 문제가 해소되었다’라고 적힌 한 장짜리 기각 사유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로슈의 무상공급이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기 위한 임시조치였다는 것을 모를 만큼 순진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정정훈 변호사는 “이번 문제는 환자가 썩은 동아줄을 잡느냐, 마지막 생명줄을 잡느냐?에 놓인 사항”이라며, “강제실시는 생명권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장치이다. 이 결정으로 우리는 환자로부터 산소 호흡기를 떼어 낸 것이다”라고 특허청의 결정을 평가했다.
그 결과 한 장짜리 문서 속에서 우리가 확인 한 것은 특허독점이라는 경제적 논리로 생명마저 소홀히 여기는 폭력적인 현실, 그리고 정부의 비겁함에 관해서다.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허독점 의약품에 대해 강제실시 청구를 했다는 것 자체는 ‘무의미’하지 않다. 미약한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지만 인간이라는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고자 노력했던 ‘유의미’한 과정이었다. 그래서 다시 이들은, ‘에이즈 환자는 살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 편에 섰다. 기각 이후 더 바빠지고 더 강해질 것이다. 지금, 이것은 어떤 법이나 경제논리로도 침해할 수 없는 인간의 가장 존엄한 권리, ‘생명’에 관한 이야기다. 물러설 곳은 없다.
글_ 9기 인턴 이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