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 논변 _ 손아람 작가
빌라 주차장이 꽉차서 주차를 할 수 없었던 날이 있다. 미등록 차량을 찾아내 차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랫집 주민이 구입한 두번째 차였다. 주차장이 1세대 1주차로 설계되어 있고 그렇게 사용하기로 입주자들이 약속했으니, 내일부터 두번째 차는 외부주차장에 주차해달라고 부탁했다.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차를 두 대 가진 게 아니꼬와서 전화하신 겁니까?”
나는 당황했다. “주차장에 등록이 안되어 있는데 차를 두 대 가진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주차장 관리비 내는 다른 입주자들이 피해를 보게 되니 차 한 대는 양보해달라고 부탁드리는 거예요.” 다시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차 두 대 가진 사람만 손해를 보라는 거잖아요. 결국 차 두 대 가진 사람이 아니꼽다는 게 아닙니까?” 더 대화가 가능할 것 같지 않아서 실례했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서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공평과 양심과 교양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질투심에 불타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탐욕을 부린 쪽은 나였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것이었다. 예기치 않게 깨달음이 찾아온 순간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갈등들이 대번에 깔끔하게 설명되는 것이었다.
탐욕 논변은 강력하다. 인터넷의 대기업 관련 뉴스 기사마다 노동조합을 탓하는 댓글이 꼬박꼬박 달리는 풍경에서는 신비로움마저 느껴진다. 기업 실적이 곤두박질 치면? 자기 몫만 요구하는 노동조합의 탓이다. 불황이 닥치면? 자기 몫만 요구하는 노동조합의 탓이다. 기업이 사상최대의 실적을 기록하면? 자기 몫을 ‘더’ 요구하는 노동조합이 여전히 비난받는다. 사람들은 기업의 이익 추구는 자본주의 보호를 받는 불변의 상수인 반면, 노동자들의 분배 요구는 탐욕을 통제하는 것으로 해소가능한 변수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최근 파리바게뜨의 가맹점 제빵사 간접고용을 파견법 위반으로 판단하고 시정조치를 내린 정부 결정을 두고 논쟁이 일었다. 더불어민주당 국민경제상황실 부실장을 맡았던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는 “파견 허용 업종이 아닌데 파견을 한 셈이긴 하다. 그것이 불공정 거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직접 피해를 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불확실하다.”며 논란에 불을 지폈다. 목적에 맞게 고안된 궤변이다. 만약 아무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면 왜 말썽이 일어났는가? 이 궤변은 파리바게뜨 사건의 원인을 ‘더 많은 임금을 원하는’ 제빵사들의 탐욕으로 귀결시킨다. 결과가 아니라 목적이 그것이다.
그러나 파리바게뜨의 간접고용정책은 파리바게뜨를 제외한 모든 당사자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 주진형 씨의 주장에는 ‘피해의 기준’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제빵사들이 월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가맹점주들이 장사로 이윤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 역시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제빵사와 가맹점주들이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몫을 파리바게뜨 본사가 차지하고 있다면 그건 당사자들의 피해이다. 탐욕 논변은 경제적 약자의 정당한 요구를 탐욕으로, 대기업의 부당한 이득 반환을 피해로 둔갑시킨다.
들여다보자. 파리바게뜨와 같은 프랜차이즈 사업자는 (1) 로열티를 받고 가맹점에 운영상의 자율을 허용하거나 (2) 직고용 혹은 직영 체제로 브랜드 통제력을 지킬 수 있다. (1)의 경우 폭발적인 사업확장이 가능하지만 본사가 통제력을 잃게 되므로 브랜드 가치를 보호할 수 없고, (2)의 경우 본사가 통제력을 갖지만 비용 상승으로 사업확장에 장애가 생긴다. 기업의 브랜드 통제력과 운영비용은 명백한 대가 관계에 있다. 보유한 자본의 크기에 따라 영세 프랜차이즈는 (1)의 방식을, 글로벌 프랜차이즈는 (2)의 방식을 선호한다. 권리와 의무가 대응하는 관계이다. 파리바게뜨는 마술과도 같은 제 3의 길을 찾아냈다. 제빵사에 대한 통제력을 본사가 가지면서 임금 지불의 책임을 가맹점주에게 떠넘기는 간접고용 방식으로 ‘손짚고 헤엄치듯이’ 가맹점포를 전국 수천 개까지 확장한 것이다. 본사의 책임이어야할 브랜드 가치 유지비용을 실질적으로 지불한 가맹점주들은 파견된 제빵사의 노동을 쥐어짜서 그 비용을 회수할 수밖에 없다. ‘할당량을 채우느라 새벽에 출근해서 화장실도 가지 못하는’ 제빵사는 그렇게 탄생한다. 이득은 파리바게뜨가 취하고 손해는 가맹점과 제빵사의 대결로 적당히 나눠갖는 시스템이다.
가맹점주가 아닌 파리바게뜨 본사를 향한 싸움을 시작한 제빵사들은 눈앞의 원한 감정을 극복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나를 놀라게 한 건 가맹점주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제빵사와 연대하여 브랜드 운영 비용을 전가하는 ‘프랜차이즈 갑질’을 시정할 기회를 움켜잡는 대신, 본사를 대리하여 직고용을 요구하는 제빵사들을 회유하고 있다. 본사 직고용은 불가능하니 제 3의 합자회사를 만들어 제빵사들의 간접고용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제빵사들이 거절하고 직고용을 고집하면? 다시 탐욕 논변이 시작될 게 틀림없다.
탐욕 논변의 기저에는 공포가 도사린다. 이기기 어려운 존재와 싸우는 건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강자의 탐욕을 문제삼지 않는다. 이길 수 없다면 그것은 불변의 상수이고, 불변의 상수라면 그것은 탐욕의 지위에서 면책된다. 하지만 누군가는 탐욕의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의 비난은 ‘바꾸기 쉬운 것’을 찾아 아래로 향한다. 노동조합이 파업만 하지 않는다면. 직원들의 임금만 동결된다면. 더 많은 시간을 일해만 준다면. 추가수당을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지대 상승을 방어할 수는 없으니 최저임금 상승을 방어할 수만 있다면. 지긋지긋한 노동자들의 탐욕만 줄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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