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감

[해외에서 생각해보는 인권] 아픈 이의 마음까지 어루만져 줍니다: 스페인의 복지 제도 – 김가영


새벽 4시, 곤한 잠까지도 깨우는 사이렌 소리에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났다. 무언가 큰 문제가 있음에 틀림없다. 이 시간에 내 방에 사람들이 너무 가득 차 있다. 정신이 가물가물 들기 시작하면서 들려오는 스페인어. “오른쪽으로 옮겨! 얼른! 다치지 않게!” 새벽 2시경 함께 귀가한 내 스페인 호스트 패밀리의 여동생이 들 것에 실려나간다. 그제서야 사람을 하나 붙잡고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만, 그저 들리는 단어는 ‘병원에 간다’ 뿐이다.


 





병원까지의 한참의 소란이 끝난 후, 드디어 의사가 훌쩍이며 기다리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카롤리나는 당뇨에 걸렸다고 했다. 언젠가부터 심하게 몸이 말라서 키가 크나 보다, 하고 말았는데 사실은 몸 속의 영양분이 빠져나가고 있었단다. 며칠 전에도 소화가 안 된다며 한밤중에 속을 게워냈던 것도 기억이 났다. 너무 오랜 기간 방치해둬서 큰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날벼락이었다.


 





그 순간 내 마음 속을 지나가는 걱정거리는 다름이 아닌 ‘돈’이었다. 내가 친가족처럼 사랑하는 내 호스트 패밀리의 아버지는 스페인 남부의 세빌리아, 그 중에서도 브레네스라는 아주 작은 도시에서 이발사로 일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몇 년 전 공장에서 상해를 입어 장애인이 되었다. 아주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분명 그들은 부유하지 않았다. 누군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집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정말로 카롤리나가 쓰러져버린 것이다. 그것도 앞으로 평생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돈이 있어야 치료 가능한 당뇨로 말이다.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한국의 부모님께라도 부탁해서 돈을 좀 보태야 하나, 이러다 정말 큰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지? 바로 그 때, 서류 뭉치를 이만큼 들고 의사가 다가왔다. 치료비 때문일까? 당장 오늘 치료비만이라도 낼 돈이 있을까? 나는 너무 불안했다. 돈 때문에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참 많이도 들어서일까, 카롤리나 때문에 가슴이 저린 이 와중에 돈 걱정까지 한 번 더 마음이 무겁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서류들은 단 하나도 고지서가 아니었다. 당뇨라는 질병에 대한 설명서, 병원에서의 치료법에 대한 설명서, 카롤리나가 먹어야 하는 약에 대한 주의 사항에 대하여 한 시간이 넘도록 의사가 종이를 보여주며 설명을 했지만, 그 어디에도 돈과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난 물어보고 말았다. “저기 그럼, 돈은 어떻게 내나요?” 의사는 따뜻한 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카롤리나의 질병은 국가가 분류한 중대 질병 중 하나이고, 국가가 지정한 특정 질병에 대해서는 환자가 전혀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고, 국세에서 그 치료비를 대준다고. 당뇨, 암, 백혈병은 물론, 뇌사(식물인간) 치료, 뇌졸증, 교통사고 피해자의 재활치료까지, 치료비가 많이 들 수밖에 없는 다양한 형태의 여러 질병이 다 포함된다고 말이다! 난 스페인의 의료 복지 제도가 그토록 뛰어나다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내 놀라움을 증폭시키려는 듯 의사가 덧붙였다. “이제 여러분이 할 일은, 카롤리나가 빨리 건강을 회복하도록 집중하는 것이지요. 결코 건강보다 돈이 중요할 수는 없으니까요. 돈은 우리 정부의 책임입니다. 여러분의 걱정 거리에는 돈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얼마 전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동하는 가수 ‘비’가, 자신의 어머니는 당뇨 때문에 돌아가셨고,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란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먹먹해지는 가슴으로 카롤리나를 떠올렸다. 같은 질병이고, 경제적 상황도 비슷한데도 불구하고 한 쪽은 죽을 때까지 치료를 보장받고, 한 쪽은 돈 때문에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다니… 우리의 병원들이, 돈을 낼 수 없는 환자를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듣던 나에게는, 스페인의 의료 복지 제도야말로 환자를 진심으로 위하는 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네의 복지 제도가, 돈 없는 아픈 이를 제외할 수밖에 없는 제도라면, 스페인의 제도는 아픈 이에게 위로를 건네주는 의료 복지 제도가 아닐까. 병으로 고통 받고, 그로 인해 가슴이 아픈 환자의 가족들에게 과연 우리는 심심한 위로라도 건네줄 수는 있었는지, 혹 추후적인 상처만 더 안긴 것이 아닌지, 하는 섭섭한 의구심이 내 가슴을 찌른다. 의사 선생님의 손을 잡고 ‘정말 고맙습니다’ 만을 연신 외치던 내 호스트 아버지의 표정을 난 오늘도 잊을 수 없다. 진정 스페인의 의료 복지 제도는, 환자의 마음까지도 치료해주는 그런 제도가 아닐까.

공감지기

연관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