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생각해보는 인권] 한걸음씩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한국 인권 -김혜민
<해외에서 생각해 보는 인권> 코너에 담을 원고를 부탁받고 반가운 마음으로 흔쾌히 응했다. 하지만 글을 쓰려니 막상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몰라 오랜 시간 고민 했다. ‘해외’에서 ‘인권’을 공부하고 있지만, 어떤 것을 풀어내야 뉴스레터를 읽는 이들과 ‘공감’할 수 있을지 가늠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인권을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없고, 관련 실무 경험도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한국 사회의 인권 상황이나 관련 기구 및 단체 활동을 해외 사례와 비교분석할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유학생활 동안 내가 경험한 이야기 중 하나를 가벼운 마음으로 써내려 가보기로 한다.
아직 한국에서는 학문의 한 분야로서 ‘인권’이 생소하지만,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법학적, 사회학적 혹은 철학적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국제연합’ 설립과 ‘세계인권선언’ 채택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등장한 ‘인권’이란 개념은 서양의 주요 국가들에 의해 주창됐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인권’이 학문으로서 만이 아니라 그 개념 자체도 다소 생경하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문화적 상대주의,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s)’라는 개념이 서양의 ‘인권’과 대립하면서 아시아의 인권은 오랫동안 낯선 손님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대학에서 인권을 연구하는 학생 및 교수진 구성은 서양 출신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커리큘럼도 아시아의 인권에 관한 내용은 배제되어 있고, 토론에서도 그 예가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다.
유럽, 미주, 아프리카, 그리고 가장 최근에 아랍권에서는 지역 인권 협약을 채택했고, 이를 기초로 각 지역마다 자체적인 인권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갖춰 나가고 있다. 특히 유럽과 미주지역의 시스템은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기능하고 있으며, 의미 있는 판례들도 내놓았다. 반면, 아시아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인권시스템이 전무하다. 이 같은 현실을 감안할 때, 아시아 인권에 대해 할 말이 점차 적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시아 인권에 목마른 나, 스스로 우물을 파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 지역에도 분명 심각한 인권 문제들이 발생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 또한 이루어지고 있다. 이 같은 아시아의 인권실태와 해결의지를 드러내고자 결국, 목마른 아시아 학생들이 스스로 우물을 파기로 했다. 인도네시아, 네팔, 일본, 한국, 말레이시아, 인도, 필리핀, 그 외에 아시아 인권에 관심 있는 非 아시아권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아시아 인권 전반에 대한 생각과 경험을 나누고, 보다 많은 학생들의 관심을 도모하기 위해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다양한 나라의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아시아에 지역인권시스템을 설립하기 어려운 이유’(예컨대,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 특성 간에 나타나는 다양성과 이질성이 그 어느 지역보다도 강하고, 공통된 관심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주장 등)들을 실제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아시아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모였는데, 정작 대다수가 공감할 만한 ‘범 아시아적’주제를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야기를 할수록 서로 간에 존재하는 틈이 더 넓게 느껴졌다. 그와 더불어, 각 나라마다 존재하는 인권 문제의 종류와 범위가 매우 다르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인도네시아 친구는 종교자유에 대해 고민했고, 네팔 친구는 열악한 보건 의료 시스템과 아동노동 및 여성에 대한 인신매매 문제를 걱정했다. 미얀마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친구는 정치 탄압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을 우려했으며, 인권에 대한 무관심을 고민한 일본 친구도 있었다.
이어 한국의 상황을 묻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한국의 인권 문제 중 그들이 처한 것과는 다른 무엇을 이야기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했다. 다행히 자문교수님께서 나의 망설임을 눈치 채셨는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국은 천국이나 마찬가지죠” 라며 운을 떼셨다. 국내 차원뿐만 아니라 유엔인권이사회 차원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나 시민사회의 역할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시며, 좋은 본보기가 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계속된 논의에서는 같은 아시아 국가라도 인권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도 실감했다. 특히 ‘미디어 법안’과 ‘용산 철거민 사망사건’등 현재 이슈에 대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런 느낌은 더욱 짙어졌다. 또한 “한국도 지난 한 세기 동안 빈곤과 정치탄압 등 현재 그들이 겪는 것과 유사한 인권 문제가 있었지만 다양한 노력 덕분에 나름 성과를 거뒀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들 역시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느꼈던 거리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인권을 보는 공정한 눈
교수님의 농담처럼 한국을 ‘인권의 천국’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인권 문제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실, 문제의 심각성은 절대적인 기준으로 비교가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한 명의 인권이 침해당하는 것은 심각하지 않고, 열 명의 인권이 침해당하는 것은 심각하다고 말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혹은, 재산권 침해가 주거권 침해 보다 더 심각하다고 말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기본권이 부당하게 침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곧 바로 심각한 ‘인권침해’로 바라보려는 인식의 확립이다.
앞서 말한 이야기를 통해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은, 한국의 인권 상황과 제도 및 활동에 대해 외국인들은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며 본보기로 삼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한국 사람으로서 국내의 인권 상황을 바라볼 때, 팔이 안으로 굽는 오류를 경계하면서 보다 더 객관적, 비판적 시각을 갖고자 늘 애써 왔다. 하지만 이러한 강박관념이 오히려 인권활동을 훌륭하게 수행해온 한국 사회의 많은 모습들을 과소평가하도록 만든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게 된다. 그 날 모임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 나는 한 쪽으로 치우칠 것을 두려워하다 오히려 다른 쪽으로 치우쳐 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게 주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곳곳에 한숨 소리 가득한 요즘, 답답함을 더하는 이야기 보다는 안심이 되고 위로와 칭찬을 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는 생각보다 꽤 잘 해 온 것 같다고, 그리고 지금도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고,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뉴스레터의 한 공간을 흔쾌히 내 준 <공감>에 감사하고, 부족한 글재주와 짧은 생각으로 채운 이 작은 공간이 읽는 이들의 마음에 어떤 의미로든 가 닿을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감사할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