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로 채워진 길 위에서 미래를 열 수 있으려면
“장래 희망이 뭐예요?” “공감이 앞으로 잘 되는 거예요.”
며칠 전 회원 두 분이 장애여성공감(이하 공감) 회원 단체 대화방에서 주고받은 대화다. 나는 활동가 특유의 진지함으로 더 열심히 해야지 맘 먹으며 새삼 ‘장래’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았다. 표준국어대사전엔 장래는 ‘다가올 앞날’이며 희망은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람, 앞으로 잘 될 수 있는 가능성’이라 적혀 있었다. 주로 장래가 촉망되는, 희망찬 미래의 용례로 쓰이는 단어들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40대 지적 장애여성의 장래와 희망에 대해 사회와 사람들은 어떤 미래를 떠올릴까? 미래와 희망, 어쩌면 구태의연한 이 말들은 왜 이토록 오랫동안 그의 말이, 나의 말이, 그리고 우리의 말이 되지 못했던 걸까?
미래를 생각한다는 건
올해 공감에선 발달장애여성 활동가와 운동을 함께 만드는 방법을 단단하게 하고자 <활동가 연습>을 진행중이다. 인권운동 안에서 발달 장애여성의 경험과 관점이 반영될 수 있게 하려는 노력을 오랫동안 해온 공감이지만, 발달장애인과 비발달장애인이 할 수 있는/해야 하는 일을 구분하지 않고 운동의 공동체를 만드는 도전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스로와 동료를 조직하는 자조모임을 통해 힘을 길러온 발달장애여성 인권투쟁단 <만세팀>은 발달장애여성의 일과 역할을 더욱 구체화시켜보자는 목표를 세우고 <활동가 연습>을 시작했다. 왜 활동을 하고 싶은 지 지원서도 작성하고 인터뷰도 거치는, 임금노동 시장의 질서를 닮은 과정도 ‘연습’ 해 보았다. 대안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이나, 누군가를 걸러내고 자격을 검증하기 위한 시험이 아닌 참여자들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과정이 되길 바랐다.
“(활동가의 역할은) 회의하고 밖에 나가고 컴퓨터 하는 사람, 전화 받는 사람. 자리가 있어서 부러웠어요. 호기심 생겼고 나도 앉고 싶었어요. 내 자리였으면 했어요. 활동가처럼 컴퓨터 하고 싶고, 자리에서 쉬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면접 보는데) 되게 떨렸어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말이 안 나올 뻔했어요. 처음 있는 일이라서 물도 마시고 화장실 다녀오고 긴장됐는데, 한번 해보자. 죽기 살기로 해보자. 안해보면 후회가 되니까. 면접 때 ◯◯님이 예전에 활동 뭐 했는지 물어서 합창반, 만세팀 했던 거 이야기했어요”
인터뷰 후기를 나누며 참여자들이 자기만의 역동으로 지나온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뻔할 뻔했던 인터뷰가 활동가들을 뜨끔하게 한다. 자신이 통과한 시간과 경험이 새로운 도전과 만나면서 고유한 빛과 이야기로 엮어지는 것처럼 참여자들은 이 과정을 나름대로 의미화 했다. 그 빛이 언제나 밝고 이야기가 찬란하여 미래를 낙관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하는 존재를 더욱 뚜렷하게 한다. 활동가 연습중인 그도, 나도, 공감의 활동들도 바로 그러한 현재의 뚜렷함이 분명할 때 비로서 출발선에 서게 되는지 모르겠다.
<돌봄선언>에선 신자유주위와 가부장제 체제가 망친, 코로나19로 확연히 드러난 사회적 불평등과 돌봄의 문제를 비판하며, 사회 전체가 돌봄의 보람과 짐을 함께 나누기 위해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며, 인간, 비인간 모든 생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 난잡한promiscuous(문란한) 돌봄”(더 케어 콜렉티브, 《돌봄선언》,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 79,80쪽)을 제안한다. ‘난잡한(문란한) 돌봄’은 1980~90년대 에이즈 인권활동가들에 의해 쓰이기 시작한 용어로 현재 기준에서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법으로 실천하는 돌봄을 의미한다. 김순남은 <가족을 구성할 권리>에서 “우리가 이미 여러 요인들로 연결된 친족망 안에서 살고 있고, 삶은 곧 난잡한 친밀성의 현장 그 자체”라고 말한다. 이때 ‘난잡한 친밀성의 정치’로 “폐쇄적 가족주의가 정말로 실현 가능한지를 질문하며 동시에 여러 갈래의 상호의존적 네트워크를 찾아가는 실천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만세팀>의 <활동가 연습>은 어느새 ‘난잡한(문란한)돌봄’을 확장시키는 시도와 연결된 실천일지도 모르겠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인 경험과 바람들로 살아온 바와 살고 싶은 바가 점차 구체화되는 것. 장래를 생각하고 꿈꾸라고 기대 받기보다 걱정과 금지를 많이 듣는 삶이었지만, 장애인 자립생활운동의 중요한 이념인 ‘위험의 존엄성’을 지지하는 동료들 속에서 실패는 다음을 이을 자원이 된다. 미래를 생각한다는 건, 위험한 현재의 상황을 같이 겪을 동료들이 있는 속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나와 동료를 지키고, 희망을 지킨다는 건
지난 2년여 코로나19로 외부활동이 어려웠던 상황속에서도 <만세팀>은 꾸준히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코로나19 감염을 걱정하는 가족에겐 외출을 줄여 달란 말을 들어야 했고, 모여서 말하기 어려운 조건들은 찾아갈 공간을 폐쇄시켰으므로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공감에선 하나의 장애여성 자조모임이 자리 잡는데 10년 걸린다는 농담 같은 진담이 있다. 7년간 활동하며 자리잡은 발달장애여성 모임은 팬데믹 시기 반년만에 흔들리는 것이 확연해 보였다. 코로나19이후 비대면, 거리두기로 빠르게 전환하는 사회의 속도 앞에서 수년 걸려 겨우 쌓은 독자적인 사회와의 관계 맺기 기술들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아! 이제 우리 더 못 만나는 거예요? 만나고 싶은데…” 연대공연도 했었고 매년 가을이면 찾아갔던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G-voice의 공연도 잠시 멈추는 것을 보며 심각한 상황이 도래했음은 더 피부로 느껴갔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질문은 심각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감염병이란 질병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지금의 위기를 초래한 자본주의 체제가 만든 기후위기라는 원인을 공유하며 지금 우리가 겪는 피해를 말하고 싸우는 것은 비장애활동가, <만세팀> 모두에게 새로운 도전을 필요로 했다. 정부가 시키는 대로 안전을 위해 집을 지키고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가 겪은 피해, 그럼에도 살아가기 위한 생존방법을 찾고 있는 내 경험을 계속 밖으로 나와 말할 수밖에 없었다.
2020년 12월엔 예방적 코호트 격리로 외부와 차단된 채 집단 감염이 발생한 송파구의 신아재활원 투쟁도 함께 하면서 장애인 거주시설 안에 묶인 동료들과 닿으려고 애쓰기도 했다. 나와, 동료들, 나의 희망을 지킨다는 건 녹록치 않았지만, 싸우는 재미를 이미 알아버린 터라 쉽사리 포기도 안 된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2022년 가을, 21년 1월 신아재활원에서 탈출한 하늘님과의 서먹함도 조금씩 사라져갈 때쯤, 21년 3월 서울시청 앞에서 진행한 ‘신아재활원 긴급 탈시설’ 이행 촉구 집회로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위반’ 조사에 임하지 않은 나에게 경찰이 체포영장을 들고 사무실로 찾아왔다. “엥, 진희님이 왜 신아원 때문에 경찰서에 가요. 우리 좋은 일 한 거 아닌가요?” 의아함과 걱정으로 전화기에 문자들이 쏟아진다. 코로나19 거리두기 완화 정책들, 일상의 회복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하는 것 같은데, <만세팀>에겐 비대면 시대도 회복의 시대도 키오스크 주문처럼 뚝딱 가능한 문제는 아니었다. 사회가 강조하고 주입한 ‘취약계층’ 보호를 통해 관리되는 ‘안전’이 아니라, 크고 작은 실패와 갈등 속에서 내 몸 어딘가에 자리잡은 힘으로 오늘도 계속 말하고, 갈등하고, 즐겁고, 싸우는 ‘연습’들 속에서 활동을 만들어 간다. 사회가 강요하는 안전이 아닌 우리가 만들고 싶은 평등한 세상과 조직문화를 <만세팀>덕분에 공감도 부단히 도전 받고 연습할 수 있게 된다.
일상이 재난으로 만드는 불평등과 저항하는 미래를 위해
이런 정답 같은 말을 하는 공감이지만, 이 공동체도 늘 갈등하고 휘청하며 더듬어가듯 일상이 만들어진다. ‘장애여성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란 오래된 질문과 답은 잠정적이며 매일 갱신된다. 최근엔 탈시설한 이른바 중증중복장애를 가진 분들과 어떻게 의사소통을 해가고 관계를 두텁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한다. <만세팀>과 연습해온 비장애여성활동가들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때 한 장애여성 활동가가 “(장애여성과 관계를 맺을 때) 그 시선의 끝에 누가 있는지 중요하다”고 말했다. 항상 대리, 대행되었던 관계가 만들었던 위계, 전시되며 대상화됐던 경험들은 관계를 맺을 때 타인이 무엇을 목표로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감각을 예민하게 한 것일까? 내 몸과 닿고, 활동지원 하고, 대화하고 있지만, 시선의 끝에 자신이 주체적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감각들이 날카로운 한마디로 던져진 것 같았다. “대화가 너무 잘 통하는 세상은 삶을 온통 편안한 것과 익숙한 것만 비춰 주는 거울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고, 그 반대의 세상에도 마찬가지로 위험은 있다(레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_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김현우 옮김, 반비 284)”는 말처럼 장애여성의 경험과 관점을 지속적으로 공감이란 공동체도 사회도 긴장감 있게 들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팬데믹 시기와 함께 새롭게 들어선 정부도 왜 이토록 오랫동안 현장에서 분투하며 쌓은 장애여성의 말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듣지 않는 것일까? 불평등이 만든 일상의 재난 속에서 나 답게 평등을 만들기 위해 분투했던 장애여성들의 운동을 비웃기라도 하는 걸까? 10월 5일 행전안전부는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관련 기능을 보건복지부 산하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로 두는 안을 골자로 한 정부조직 개편안을 마련 중이라고 밝혔다. 장애여성이 경험하는 일상이 왜 성차별인지, 차별받는 성소수자와 함께 왜 연대하는지, 장애여성이 외치는 성평등의 가치가 왜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만나는지 광장에서 외쳤던 것은 불평등에 저항하기 위해서다. 여성가족부가 이 모든 걸 대신해주지도 않았지만, 그것에 기대어 싸우지도 않았다. 최소한의 국가의 역할을 정부는 알아야 하고, 장애여성 정책이 취약계층 프레임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는 외침이었다. 인권운동 현장의 장애여성들은 실패로 채워진 길 위에서 자신이 스스로 장래와 희망을 일구는 삶을 원한다고 말한다. 여성가족부라는 하나의 부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불평등과 싸우는 저항하는 오늘이 만들 미래를 위한, 중단 없는 싸움의 여정으로 장애여성의 이름으로 성평등을 말하고 싸워갈 것이다.
글_이진희 (장애여성공감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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