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라는 질문
그 방에 ‘갇힌’
5년 전 텔레그램성착취, 소위 ‘엔번 방’에 갇힌 건 나인지도 모른다. 피해자 지원 과정에서 입은 상처로 전문가를 찾아 도움을 받기 시작한 지 2년째다. 지난달, 이제 상담 주기를 줄여가도 좋겠다는 결정을 하고 난 직후였다. 연일 보도된 딥페이크 범죄 관련 보도로 TV를 켜 놓은 식당은 들어가지도 않았고, 주요 포털사이트 메인화면에서 뉴스를 지워버렸다. 쏟아지는 소위 ‘딥페이크’ 사건 보도를 접하고 몇일 뒤 오후 늦은 시간 피해 사건 연계 연락을 받았다. 마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데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늦은 퇴근 뒤 선잠을 자다 새벽에 깨 먹은 걸 다 게워내고 다시 잠들지 못해 끙끙 앓았다. 다시 상담 주기를 좁히기로 했다. 더위가 가시기 전이었는데 추웠다.
‘왜’ 라는 질문
5년전 지원한 유포 피해자가 새벽에 전화를 걸어 내게 물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피해자에게 왜라는 질문은 지옥이다. 심지어 사건과 전혀 상관없이 자신이 저지른 사소한 잘못을 다 끄집어 내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피해자는 아무(런 잘못된 )것도 하지 않았다. 그 일은 일어났고, 이 일은 합리적 인과관계를 이해한다고 수용될 경험이 아니다. 내 동료들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 업무가 고되겠다고 위로한다. 피해촬영물을 들여다 보고 피해자를 다독이는 일이 힘들겠다고. 하지만 내게 깊은 상흔과 공포를 남기는 것은 피해촬영물을 주고 받으며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다. ‘놀이’는 목적이라는 게 특별히 없어서 아마 대화의 당사자들도 본인들이 왜 이러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진 않았을 거다. 왜라는 질문은 피해자에게’나’ 중요하다. 왜라는 질문이 아무한테나 던져지면 지옥문이 열린다. 질문의 주체, 상대, 방법이 5년 동안 제대로 다뤄진 적이 있는지 계속 자문하고, 생각해 본다.
관계성-아는 사람-에서 성적 의미 극대화
딥페이크 사건과 관련된 피해자 가해자 모두 10대인 경우가 70%가 넘는다 하고, 초중고교에서 발생한 경우가 많아 교육부와 학교의 대응도 이어졌다. 한 학교는 여학생들을 따로 소집해 SNS 게시물을 내리게 했다는 보도가 기억에 남는다. 일단 피해자가 몸을 사리는 방법이 최선이라는 대책. 피해자가 노출이 심한 옷을 입지 않는다면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도 낮아질 거라는 낡은 가설이 여전히 그 힘을 과시한다. 디지털성범죄는 신종 기술 범죄지 신종 성범죄가 아님을 확인한다. ‘지인능욕’이라는 이미지 기반 범죄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가진 관계 안에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대상화 할 때 비로소 범죄 가해 혹은 ‘놀이’로서 완성된다. ‘아는 사람’이라는 요소 자체가 이미 성적 의미를 극대화 할 수 있는 ‘맥락’이 된다. 그건 ‘야’하거나 ‘선정적’이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한 공동체에 함께 몸 담고 있는 이를 성적 이미지로 만드는 깔대기를 기꺼이 들이 댄 것, 성적 대상으로 소비할 수 있게 ‘의미’를 부여한 행위 그 자체로 문제다. 그렇다면 만들어진 이미지 결과물이 있어야지만, 그 내용이 어느 정도는 ‘성적’이어야지만, ‘음란’해야지만 처벌할 수 있다고 평가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사진의 수위가 ‘낮아서’ 수사가 어렵다고 신고를 반려당한 사례들을 듣는다). 오히려 아는 사람을 대상으로했다는 점 자체에서 성적 의도를 의심해볼 여지가 생긴다. 관계 내 발생 사건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일상 회복은 더 어렵다는 것도 가벌성 판단에 반영되어야 한다.
차별에서 폭력으로, 사건의 반복
이건 다 오랜 성차별적 ‘전통과 역사’에서 함께 배운 것이라 가능한 혼자할 수도, 혼자하면 재미도 없는 ‘팀플레이’다. 내 친구가 똑같은 교복을 입고 공부하는 우리 사이를, ‘선수가 될 사람’과 ‘놀 거리가 될 공’으로 나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권력관계다. 한 철 10대의 호기심이라고도 한다, 5년 전 중고생은 텔레그램성착취 사건을 목격한 세대지만 5년 뒤 딥페이크 사건 보도를 촉발한 대학별 딥페이크 피해촬영물 공유방인 소위 겹지인 방의 개설자이자 참가자로 자랐다. ‘겹지인’ 이라는 대화방 이름으로도, 불신과 불안을 심화하는 그 범죄의 양상으로도 디지털성범죄를 막기 위해 이뤄진 법제 개편과 처벌 강화가 사건의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는 최선이 아닐 뿐 아니라, 유일한 대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시 보여준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부지불식 간에 체화한 성차별적 사고가 폭력으로 이어진 거라 문제를 지적할 교육을 할라치면 ‘편향’되었다고 막아서는 모순에 숨이 막힌다. 일반적인 다른 범죄에 비해 높은 45%라는 재범률, 반복의 원인이 차근 차근 다뤄져야 달라질 것이다.
그 방 문을 열고 닫는 힘
5년 전 만난 이들, 누를 수 없는 번호, 부를 수 없는 이름을 떠올려 속으로만 안부를 물으며 거리를 걷는다. 그이들도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핸드폰을 들여다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거나 마무리하는 게 다르지 않으리라 짐작해 본다.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자는지. 별 내용없는 인사말을 누른다. 전송을 할 수는 없다. 뜬금없는 피해자변호사의 연락이 혹시 5년 전 사건을 ‘쓸데없이’ 떠올리는 게 되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아쉬운데로 찾아본 건 그이들과 과거에 주고 받은 메일이나 문자다. 지우고 없는게 많다. 불법사이트에 연쇄적인 유포에 개인정보 노출로 학교를 그만둬야 했던 그이, 취업알선을 미끼로 신분증과 계좌번호까지 사진과 함께 보내 유포협박에 시달리다 신고했지만 결국 광범위한 유포피해를 입은 뒤 포기하지 않고 단체를 찾아 도움을 요청한 그이, 아파트 복도에 침입해 집안 촬영을 시도한 범죄 정황을 알게된 뒤 직접 증거수집하고 신고까지 해낸 그이, 직장 공용 화장실에서 발견한 불법카메라를 신고하고 직장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 그이. 범죄피해를 입고도 ‘가만히 있지 않은’ 그이들 곁을 지켰던 여러 그이들까지. 잠깐 지나는 터널 속에서 빛이 끊기면 쉽게 잊어버리는 중요한 사실, 혼자가 아니(었다)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 사이 학교를 졸업해 취업했다는 소식을 전한 이도 있고, 무지개 뜰 정도로 날이 좋아 문자했다던 이도 있었다. 결과랑은 상관없이 고된 여정을 함께 해주어 고마웠다는 인사도 받았었다. 그이들이 지켜내고 있는 일상이 지금 사건 해결을 막 시작한 여러 그이들에게 큰 힘이 된다. 새로운 사건, 그 방의 손잡이를 열고 닫는 것에 힘을 싣기 위해 서로를 향한 응원이 다시 필요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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