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월례포럼] ‘어느 날 그 길에서’ 후기_ 김푸른샘 9기 인턴
먼저 인간이 만든 그 길에서 숨져 간, 팔팔이와 수많은 ‘대지의 거주자’들의 목숨 앞에 아주 오래된 시 ‘인디언의 기도’를 바칩니다.
밤과 낮을 쉬지 않고 운항하는 어머니 대지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다른 별에는 없는 온갖 거름을 지닌 부드러운 흙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해를 향하고 서서 빛을 변화시키는 이파리들과 머리카락처럼 섬세한 뿌리를 지닌 식물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들은 비바람 속에서 묵묵히 서서 작은 열매들을 매달고 물결처럼 춤을 춥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하늘을 쏘는 칼새와 새벽의 말 없는 올빼미의 날개를 지탱해 주는 공기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우리 노래의 호흡이 되어 주고 맑은 정신을 가져다주는 바람에게.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우리의 형제자매인 야생 동물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자연의 비밀과 자유와 여러 길들을 보여 주고,
그들의 젖을 우리에게 나눠 줍니다.
그들은 스스로 완전하며 용감하고 늘 깨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물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구름과 호수와 강과 얼음산에게도. 그들은 머물렀다가 또 여행하면서
우리 모두의 몸을 지나 소금의 바다로 흘러갑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눈부신 빛으로 나무 둥치들과 안개를 통과해 곰과 뱀들이 잠자는 동굴을 덥혀 주고,
우리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태양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수억의 별들, 아니 그것보다 더 많은 별들을 담고 모든 힘과 생각을 초월해 있으면서
우리 안에 있는 위대한 하늘, 할아버지인 우주 공간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하나. 내 부끄러운 고백
지난 토요일, 관악산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목에는 서울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비둘기 떼가 삼삼오오 모여 뒤뚱거리고 있었다. 예전에 비둘기 소화물, 이른바 물똥을 이마에 그대로 맞은 뒤부터 비둘기를 기피하게 된 나는 비둘기가 푸드덕 도약할 때마다 움찔움찔하며 몸을 피했다. 그런데, 앞서가던 일행 중 누군가로부터 작은 비명 소리가 났다.
자연스레 눈길이 간 그 곳에는 비둘기 사체가 도로에 껌처럼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짙은 잿빛 도로에 숭숭 박힌 몇 개의 깃털만이 비둘기의 살아생전 모습을 상상케 했다. 옆에서 “어머, 어떡해!” 하고 안타까움인지 뭔지 알수 없는 소리가 터져 나오자, 내 입에서는 차가운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죽은 게 낫지 않아요?”
이건 무슨 헛소리인가? 그렇지만 난 정말 그때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생각했다.
‘껌처럼 납작하게 확실하게 찌부러져 있는 것이, 어설프게 죽은 것보다 덜 더럽고 덜 징그럽다고.’
영화를 보는 내내, 지난 토요일의 내 헛소리가 생각나 괴로웠다. 나 자신의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무지하고 편협한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던 추악한 내 모습을 확인하느라 식은땀까지 줄줄 흘렸다. 생명 앞에서도 징그럽다느니 더럽다느니 탓만하는 철저히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자화상을 확인하는 시간이어서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다.
둘. 파리, 모기와 함께 패닉의 춤을
공황 상태에 빠졌던 그날 어떻게 집에 갔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려고 펼쳐 들었으나, 방전된 컴퓨터 모니터처럼 내 머리 속은 그저 캄캄해질 뿐이었다.
집에 도착해 냉수를 마시려고 정수기에 컵을 갖다 대던 그때, 식탁 위에 은박지로 싸여진 음식 접시 주변을 맴돌고 있는 철 이른 파리가 눈에 들어왔다. 파리를 쫓으려고 다가가던 내 손은 갑자기 멈췄다. 네 바퀴 동물(괴물)과 함께 인간이 쌩쌩 달리던 그 길은 야생동물에게는 집이었고, 밑을 내려다보지도 않으며 터벅터벅 걸어 개미를 짓밟던 그 길도 개미의 집이었으며, 어린 시절 채집을 한다며 잠자리채와 통을 들고 괴롭혔던 나무들은 잠자리와 매미의 집이자 나무의 몸이었다. 지금 음식 접시가 놓인 식탁은 파리에게는 먹이를 구하기 위한 사냥터라는 생각에 움찔해서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두커니 어두운 거실에서 물을 마시던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은박지를 조금 걷어 놓고 잠이 들었다. 그 날, 사냥을 끝낸 파리는 자고 있는 내 침실과 다른 방을 맴돌다 잘 갔겠지? 아침에 일어나보니, 어디론가 길을 떠난 후였다.
며칠 전, 월례포럼 후기를 쓰려고 컴퓨터에 앉았을 때였다. 아직 여름이 시작되지 않았는데 벌써 조그만 모기 하나가 앵앵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헉”. 순간 놀라서 의자에서 튀어 올랐다. 모기를 만나면 항상 자동으로 나오는 내 과잉 액션이다. 모기를 잡으려고 허둥지둥 책과 휴지를 찾던 나는, 순간 영화가 기억나 다시 자리에 그냥 앉았다. 후기를 쓰고 있던 도중, 모기가 내 종아리 근처에 잠시 착륙했다. ‘나에게는 다리지만, 모기에겐 사냥터이자 식량이지.’ 다리를 움직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순간의 고민에 빠진 나는 슬쩍 다리를 움직이며 생각했다. ‘단지 다리가 저려왔을 뿐, 모기에게 피를 주기 싫었던 게 아니야’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모기의 ‘앵앵’거리는 소리가 자극적으로 들려올 때마다 난 온몸을 뒤척이며 담담한 척 후기를 쓰고 있었다.
셋. 눈이 아름다운 그분
인간의 관점의 전환을 제안하고 싶었다던 그분의 눈은 시골 밤하늘의 별처럼 맑았다. 동물의 입장에서는 자동차가 네 바퀴 달린 동물로 보일 수도, 눈에서 붉은 불을 연중 품어대고 어디론가 질주하는 ** 동물로 보일 수도 있었겠지?
인간 위주의 시선에 전환을 의도했다던 이 영화의 덫에 걸려, 나는 제일 먼저 눈을 씻었다. 귀여운 팔팔이에 빠져 눈물로 눈을 씻었고, 소쩍새 두꺼비 족제비의 사체에 심장의 눈을 씻을 씻었다. 거북이가 네발 달린 동물이 지나가는 순간, 껍질 속으로 목을 웅크리고, 뱀이 몸을 배배 꼬며 입을 크게 벌리는 모습,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며 이제 심장이 서서히 저려왔다.
눈보다 머리를, 심장보다 머리를 더 비대하게 키워왔던 내 불균형의 스물 살을 영화 속에 빠뜨려 놓고 나의 눈을 나의 심장을 씻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대안을 고민했는지, 대안이 구체적으로 안 보여서 답답했는지 이자현 씨가 ‘대안이 안 나온 듯하다’고 ‘왜 답을 제공하지 않았냐’고 제일 먼저 질문을 던졌다. 사실 우리 모두 던지고 싶은 질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질문에 황윤 감독님은 ‘대안 제시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주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맑은 눈의 그 분의 방식,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 방식은 유효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뒤숭숭하게 아주 불편하게 잠도 못 자고, 사소한 나의 행동부터 사소한 나의 일상부터 뒤집어놓고, 또 정말 로드킬의 대안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모자라는 내 감성과 지성을 뒤적이고 있으니 말이다.
넷. 나와 같은 불온한 영혼들을 떠올리며
그래도 이 후기에 내 부끄러운 고백을 토로해 버렸지만 그래도 난 너무 억울하다. 난 아무렇게나 막 살지도 않았다고 생각하니까 더 억울하다. 그래서 나와 같이 떼거지로 불온한 나의 친구들 얘기를 꼭 헐값으로 들려줘야만 한다.
그 일은 중학교 3학년 교실에서 일어났다. 잠시 중학교 교실로 돌아 가 본다. 빼곡한 책상 의자 뒤로 옵션으로 구질구질한 청소함이 놓여 있고 그 옆으로 걸려 있는 것, 길다란 몸매에 회색을 넘어 검은 빛에 가까운 머리털을 가지고 있는 그 남자, 퀴퀴한 냄새까지 풍기면서 항상 하루의 대부분을 거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남자, 이름 하여 대걸레가 있었다.
우린 교실 뒤쪽에 모여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퀴 모양의 벌레, 그러니까 털이 많은 바퀴벌레가 불시착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교실은 난리, 폭동이 일어났다. 악악거리고 꺅꺅거리고 우린 비명을 질러댔고 그러면서 동시에 얌전하게 걸려 있는 대걸레를 뽑아들고 그 바퀴벌레를 향하여 수없이 수많은 손들이 덮쳤고 후려 쳤다.
어떻게 되었을까? 우린 모두 눈이 벌건 살육자가 되어 대걸레 밑에 납작하게 뻗은 바퀴를 쓰레받기에 담아 들고는 화장실로 뛰었고 화장실에 도착하자마자 변기에 던져 버리고는 물을 확 내려 그의 처참한 일생을 수장하는 걸로 마감해 버렸다.
우린 모두 똘똘 뭉쳐서 이런 광란을 벌이고도 다 멀쩡했다. 다 괜찮을 것이다 지금도. 더구나 내 후배들도 그 교실에서 괜찮을 것이다. 선배들과 같은 짓을 반복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살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데 나만 괜찮지 않은 것 같다. 그 영화 때문에, 그 한 시간 남짓의 영화 때문에 흔들리고 몸살이 났다. 몸에 지진이 난 것 같고 폭풍이 훑고 지나간 것 같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고 떨고 있다.
‘그런데 왜 그럴까? 우리들은 왜 그랬을까?’ 하고 억울해하며 그 원인이 되는 냄새 나는 진원지를 향하여 걸어갔더니, 그리 오래지 않아 우리들의 광기, 광란이 시작되는 곳에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것, 무지다. 무지하게 내버려 둔 것, 교육의 부재 탓이다. 생명교육의 부재, 권리교육의 부재이다. 우리들을 십 여 년 동안 국영수과사에만 매달리게 하고 생명의 고귀함, 경외심에는 눈 돌릴 시간도 곁눈질할 시간도 없이, 마음 줄 시간도 없이 한 방향으로만 몰고 가는, 붕어빵을 찍어내는 이 나라의 교육 탓이다. 그러니까 내가 관악산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은 다 무죄?? 용서해야만 한다???
다섯. 공동체 상영에 관한
우린 이 영화를 공동체에 모여 함께 보고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또 다른 많은 분들도 어딘가에 모여 이 영화를 볼 것이다. 이른바 이런 것을 대안적 방식인 ‘공동체 상영’이라고 어디서 들은 것 같다.
난 이 영화를 보고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영화야말로 다 커버린, 머리가 굵어져 버린 어른에게도 필요하지만 지금 아직은 어른보다 덜 굳었고 유연한 싹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공동체, 그러니까 아이들이 모여 우글거리는 곳, 바로 학교에서 상영하여 자라나는 어린이가 강력한 공감 바이러스를 맞고 튼실하게 자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렇게 보급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딜 통해서 하지? 누가 해야 하는 거지? 돈은 누가 대지? 정말 공짜로라도 보여 주면 안 되는 건가?
여섯. 자, 이젠 어느 날 그 길에서 이젠 작별을 하자.
이젠 우린 오래된 폭력들과 작별해야 할 시간인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인간의 이기주의가 만들어 낸 것들이 부메랑이 되어 인간의 가슴에 퍼버벅 꽂히기 전에.
이젠 우린 미국의 시인 ‘웬들 베리’가 비판한 철거 문명, 이 지독한 개발 문명에서 작별해야 할 시간이다. 이 오래 된 지구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고 대지에 사는 모든 것들의 삶터이고 집임을 기억해야 할 시간이다.
누군가는 평화를 이렇게 정의했다. ‘평화는 조용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 없는 세상이라’고. 이제 우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로 하자. 지구상의 모든 거주자들이 야생의 거주자들이 고통 받지 않고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로 하자.
누군가는 선언적인 동물보호법 말고 실현 가능한 동물보호법을 확실하게 만들기로 하자. 또 누군가는 그 법을 제대로 실행하기로 하자. 또 누군가는 이런 영화를 만들고 또 누군가는 이런 영화를 학교에 곳곳에 보급하고. 또 누군가는 생명 사상, 생명 교육을 실행하고, 또 누군가는 동물들이 더 이상 삶터를 잃지 않고 평온하게 살 수 있도록 생태 도로를 만들어 주고, 또 누군가는 야생동물 출현을 알려 주는 네비게이션을 만들고, 또 누군가는 그 네이게이션을 달고 과속하지 않고 안전운전을 하는 녹색운전자가 되고, 또 누군가는 길을 만들 때부터 야생 동물의 이동 경로를 고려해서 길을 만들고, 또 누군가는 정부에 야생동물 보호를 위한 각종 법안을 상정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또 누군가는 공동체에서 생명의 시, 생명의 글을 가르치고, 또 누군가는 동물들의 유도 펜스를 만들고, 또 누군가는 월례포럼에 참여하여 눈물을 흘리고 또또 누군가는 후기를 쓰고 또 누군가는 또또또 누군가는…….
자, 이제 어느 날 그 길에서 작별할 것들과 작별을 하자. 그리고 사랑과 평화와 상생의 삽을 들자. 들어 보자.
Shall we dance?